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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육조시대의 사후세계 이야기 차은정 선생님의 발표를 통해 중국 육조시대의 지괴소설(志怪小說) 중 한 편을 구경하게 됨. 소개받은 이야기는 에 실린 글로, 죽었다가 열흘 있다 다시 살아난 조태(趙泰)의 이야기이다. 그는 죽어있던 동안 그가 구경한 사후세계의 모습을 상세히 전한다. 처음에 그는 병졸들에게 끌려가서 대기하다가 명부에 이름이 적힌 것을 확인한 후 생전에 했던 행위의 선악에 대해 심문을 받는다. 그는 관리가 되어 지옥을 순찰하게 된다. 모래를 나르는 지옥과 불지옥을 다니다 부모와 형제를 만나기도 한다. 그는 부처님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제도하는 ‘개광대사’라는 공간을 본 후, 지옥의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다른 업보를 받는 ‘수변형성’이라는 공간을 구경한다. 사후세계의 심판이라는 관념과 윤회설이 어떻게 결합되어 설명되는지 이.. 2023. 4. 27.
마나로서 지녀진 예수 필요한 부분이 있어 선생님의 옛 글을 찾아보았다. 정진홍, “토템과 마나의 예수”, 217호(1976년 7월): 54-58. (이 글은 후에 (1986)에 수록된다.) 파일: Totem_Mana_Jesus.pdf 종교학 용어 셋을 인상적으로 사용해서 한국의 예수 이미지가 정립되지 않았음을 비판하는 글이다. “교회 안에서 토템이 되어버린 예수상, 신학에 의해서 터부가 된 예수상, 그리고 신도들에 의하여 마나로 화해진 예수상”(58)이 그 내용이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 토템의 기치를 휘두르며 세상-다른 토템-과 스스로를 구분하는 열심 속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신학은 교회와 신도들을 질책하는 오만한 자리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터부화시켰으며, 신도들은 제각기의 삶의.. 2023. 4. 27.
다이몬, 신이 아닌 존재 플라톤의 에서 ‘다이몬’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목을 만나다. 은 에로스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 중심으로 이루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소크라테스가 들은 디오티마의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테마에게 배운 것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에로스가 신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묻는다. “그러면 도대체 에로스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는 가사적인(죽을 수 있는) 것과 불사적인 것의 중간자라 할 수 있지요.” “디오티마여! 그 중간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크라테스여! 그것은 위대한 정령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정령(daimon)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신과 가사적 존재의 중간자라 할 수 있답니다.” 정령은 신이 아니고, 신과 인간을 매개.. 2023. 4. 27.
신, 궁극적 실재의 방편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것”이라고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기독교 위주의 종교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의는 계속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식의 정의를 교정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이다. 유럽의 불교인들은 서구적인 종교 개념의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독일의 불교”라는 김명희 선생님의 발표의 한 대목이다. 달케(Paul Dahlke, 1865-1928)는 종교가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면 종교로서 불교를 정의할 때 불교가 ‘신 없는 종교’의 구조를 갖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달케는 종교는 ‘신에 .. 2023. 4. 27.
크루소의 종교 소설 는 1719년에 출판되었다. 맥그레인은 이 소설에 나타난 타자와의 만남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크루소의 경우에 그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19세기 진화론적 인류학의 경우처럼 시간이 아니라 종교이다.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지리적 종교가, 직선적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 종교가 가로놓인 것이다. 크루소의 외딴 섬은 기독교적인 지리 내에 위치한다. 지구 표면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관심의 모눈이라는 위도와 경도 아래 존재한다.…… 크루소가 보기에 ‘야만인’들은 벌거벗었고 자신은 옷을 입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총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그는 영혼에 기독교로 무장하였다. 타자는 원시인(primitive)이 아니라 야만인(savage)이다. 기독교적인, 종교적인 인식 내에서 타자가 출.. 2023. 4. 27.
생활난의 원인을 말해주는 창세기 일본 그리스도인과 ‘생활’이라는 특이한 주제에 끌려 들어갔던 발표회. 일본 여성 근대교육가로서 유명한(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하니 모토코(羽仁もと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계부라든지, 가정잡지, 교육 등 다소 독특하면서도 우리 생활과 무관하지 느껴지지 않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타이트’한 생활 관념이 기독교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 발표자는 하니 모토코의 신앙이 ‘독특하다’고 표현하였는데, 그 독특함은 창세기에 대한 그녀의 독창적인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가 창세기에서 읽어내는 주제는 ‘진보를 위한 싸움’이다. 그녀에 따르면 태초에 아담과 이브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영성의 눈을 떠서 자신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 2023. 4. 27.
겐테가 본 한국종교(2) 19세기말, 20세기초 서양인들의 종교묘사는 서울에 변변한 종교건물이 없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대표적인 예는 비숍) 겐테도 그러한 예를 따라 서술을 시작하였다. 약간 차이가 있다면 원구단을 본 자신의 관찰을 집어넣은 것.(원구단의 기능에 대해서는 문묘(文廟)와 헛갈린 것 같다.) 이상하게도 조선의 수도에는 절이 없다. 다른 아시아 지역, 완전히 문명화되었거나 어설프게 개화된 세상 어디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실일 것이다. 궁궐이 있고 수십만명이 사는 거대한 수도에서 한두 종교는 신봉할 만한데, 사찰이 없다니 신기할 따름이다.……서울의 중심 황제의 궁궐 한가운데에는 유일하게 사찰 지붕이 하나 눈에 띄었다. 조선 관료들의 모범이 되는 중국 현자들의 제사를 모시는, 베이징의 거대한 사원을 소박하게 모방해 지은 .. 2023. 4. 27.
겐테가 본 한국종교(1) 독일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는 1901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고, 그가 취재한 기록은 1901년 10월~1902년 11월에 에 연재되었다. 이 내용이 그의 사후에 책으로 발간된 것은 1905년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다음 책으로 매우 깔끔하게 번역되어 있다. 지그프리트 겐테, 권영경 옮김, (책과함께, 2007). 짧은 기간 한국에 있었지만 그의 관찰력은 상당히 날카롭다고 생각된다. 사실 종교만큼 날카로운 관찰의 힘이 무뎌지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사유의 습관의 힘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이기에, 이전 관찰자들의 기록을 답습하지 않기가 힘든 게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겐테의 경우에도 이전 관찰자들과 동일한 관찰 대상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 2023. 4. 27.
매럿 이전과 이후의 종교학사 매럿에 대한 한 논문 소개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매럿은 종교학사에서 거의 잊혀져가는 학자에 가깝다. 그런데 키펜베르크는 매럿이 전애니미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시점(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을 종교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지적한다. 굉장한 통찰이다! 20세19세기 종교학은 원시종교를 통한 종교 기원의 탐구가 유행했던 시기이다. 물론 그 시기의 종교 연구도 ‘야만인’의 종교를 문명사회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그들’과 ‘우리(서양인)’ 간의 연속성 상에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해의 진전을 평가해야 할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야만인은 야만이고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비슷한 부분은 고대의 ‘흔적’ 혹은 ‘잔존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시기 원시종교.. 2023. 4. 26.
넌 이미 죽은 목숨 인류학자 에반스프리차드의 책에 등장하는 ‘살아있으되 죽은 사람’ 이야기.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의례의 강력한 효력에 대한 인상적인 예이다. 사회적 자아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나 진배없다는 이 이야기는 그리 과장된 것으로 들리지 않아 슬픈 여운을 남긴다. 마을에는 덥수룩한 외모의 우울한 표정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가트부옥(Gatbuogh)였다. 이 사람은 몇 년 전에 멀리 여행을 나갔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마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마침내 그를 위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 후 그가 마을에 돌아왔고 내[에반스프리차드]가 방문할 때에도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는 ‘조악 인 테그’(joagh in tegh), 즉 살아있는 유령이라고 묘사되었다. 나는 “.. 2023. 4. 26.
그들을 연구하듯이 우리를 연구하는 것 학계에서 솔직한 글을 만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예의 없음’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런 글에서 좋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내 생각과는 반대일지라도. 세속적인 현대 미국 대학에서 가장 서글픈 사실은 성서에 관한 표준 강좌들이 커리큘럼 중에서 가장 형편없으며 게다가 썩어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서를 공부함으로써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다. 이는 대학의 성서 학자들이 근대 대학에서 확립된 ‘역사비평’ 방법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데, 성서연구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 대학의 성서 비판가들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무장한 채, 수세기에 걸친.. 2023. 4. 26.
뮐러의 '진정한 종교' 막스 뮐러의 글을 읽다보면 신학적인 이상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예를 들면, , “서문”, “선교에 대해서”) 19세기에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 시각에서 보면 새삼스럽게 느껴지며 선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유의미하게 작용했으리라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키펜베르크는 막스 뮐러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 점을 속시원하게 지적한다. 뮐러는 감각적 지각과 이성적 지각과 더불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이 능력은, 슐라이어마허가 이미 다룬 바 있는 것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성을 지각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해준다. [뮐러에 따르면] 언어의 역사 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시기로 돌아갈 수 있으며, 여기서 “진정한 종교”(authentic re.. 2023. 4. 26.
좀더 현실적인 개념을 만들었다면... 번역어로서의 ‘종교’라는 단어는 기독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생겨난 것이다.……메이지 정부가 서구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확립시키려 했을 때……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나 불교, 신도 등을 하나로 다룰 개념이 필요하게 되어 종파라는 의미가 아닌 ‘종교’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1874년(明治7)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종교’가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제도종교, 즉 이 책에서 말하는 교단종교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자연종교를 포함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일본인이 교단종교의 신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무종교’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거침없이 ‘무종교’를 표명한다고 비난받는 것도, 그 원인은 대다수 일본인의 종교 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종.. 2023. 4. 26.
구조와 역사의 잡음 구조주의는 역사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취약하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심지어 구조기능주의는 사회의 변화보다는 정지된 상태를 설명하는 보수적인 이론이라는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도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너무 손쉬운 정리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역사와 구조가 일으키는 긴장이다. 구조는 공시적인 것이지만 통시적인 변화의 와중에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고려 없는 구조는 맥이 빠진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변화, 우연한 사건(event)이 구조 안에 어떻게 포섭되며 어떻게 구조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레비스트로스 책에 언뜻 등장하지만 눈길을 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토템이라는 전통적인 분류체계 내에 배열되는 모습. 두 번째 이야기는 조금 더 .. 2023. 4. 26.
타일러, 애니미즘, 심령술 에드워드 타일러의 (1920[1873])에서는 그 유명한 “최소한의 종교 정의”를 제시한다. 그것은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the belief in Spiritual Beings)이다.”(424) 그는 ‘영에 대한 믿음’을 일컬어 ‘애니미즘’이라고 불렀다. 사실 애니미즘은 간간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표현이다. ‘스피리추얼’(spiritual)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니까 간단히 ‘스피리추얼리즘’(spiritualism)이라고 하면 간명할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고충이 있었다. 스피리추얼리즘(spiritualism)은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에 유행한, 영매를 통해 죽은 자와 교통하는 새로운 종교현상을 지칭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애니미즘(Animism)이라는 이름 아래 영적 존재에 대.. 2023.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