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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겐테가 본 한국종교(2)

by 방가房家 2023. 4. 27.

19세기말, 20세기초 서양인들의 종교묘사는 서울에 변변한 종교건물이 없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대표적인 예는 비숍) 겐테도 그러한 예를 따라 서술을 시작하였다. 약간 차이가 있다면 원구단을 본 자신의 관찰을 집어넣은 것.(원구단의 기능에 대해서는 문묘(文廟)와 헛갈린 것 같다.)

이상하게도 조선의 수도에는 절이 없다. 다른 아시아 지역, 완전히 문명화되었거나 어설프게 개화된 세상 어디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실일 것이다. 궁궐이 있고 수십만명이 사는 거대한 수도에서 한두 종교는 신봉할 만한데, 사찰이 없다니 신기할 따름이다.……서울의 중심 황제의 궁궐 한가운데에는 유일하게 사찰 지붕이 하나 눈에 띄었다. 조선 관료들의 모범이 되는 중국 현자들의 제사를 모시는, 베이징의 거대한 사원을 소박하게 모방해 지은 건물[원구단]이다. 아름답게 올라온 원형건물과 우아한 난간이 있는 작은 사원에서는 제사만 지낼 수 있다. 일반 백성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없었고, 이런 권리가 없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것 같았다.(196-97)

이어서 한국인의 다원적인 신앙세계. 이 역시 당시 한국종교 서술의 단골 메뉴이다.(대표적인 예는 존스와 헐버트) 다만 겐테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여러 종교들을 나열하는 차이가 있다. 그는 한국인의 신앙이 ‘변덕스럽다’고 파악한다. 그래서 신앙이 새로 들어올 여지는 많지만 들어온 신앙에 대한 충성도는 떨어진다고 보았다. 이 대목은 한국인을 완벽하게 거꾸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유럽 신자들의 형편을 교회에 매인 몸으로 보는 재미있는 견해가 삽입되어 있다.

 

사실 조선인들은 선량한 만큼 신앙이 필요없다. 하나의 종교에 정착하지 못하고, 서너 개의 종교를 두루 거쳐가는 이상한 무관심을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한다. 즉 유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교육을 받으며, 부모들은 자식들을 자신과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는 가장 바람직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 후 나이가 들어가면서 토속적인 원시신앙에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추종자가 된다. 정령을 숭배하고 나무나 돌에 기원하며 온갖 미신적인 관습으로 가득한 샤머니즘은, 수천 년 전이라 지금이나 여전히 민족의 종교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임종이 다가오면 조선인들은 결국 불교에 귀의한다. 불교의 영원한 윤회사상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그들에게 그럴듯하면서도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나라 어디서나, 관직상 유교의 예를 지키는 국가 관리들조차 불교 관습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낸다. 석가모니나 아미타불 제단에 동전하나 올리지 않던 사람이라도 중병에 걸리거나 임종이 다가오면, 가까운 절이나 암자의 스님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이런 여건은 제4의 종교나 다른 종교가 들어올 수 있는 실마리가 되며, 선교사들이 의술과 신기한 의약품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조선인의 종교적 감정은 믿음으로 확실히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 대다수의 서양인들이 직면한 단계까지 한번도 이르지 못했다. 서구인들에게 종교는 예의범절을 위해 단순히 규율과 관례를 따르고 참여하는 관습적이고 외형적인 형식과 교육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교회건립을 위해 기부금을 내놓는데, 단단한 결속력으로 잘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신도들이 너무 무관심해서 사찰을 건립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절을 세운다 하더라도 아무도 가지 않을 것이며, 중국처럼 텅 빈 채로 먼지만 수북이 쌓이고 결국 황폐화될 것이다.
남태평양이나 아프리카 대륙의 원시인들처럼 조선인들도 막연한 상상력으로 좀 더 권위있는 힘이란 악령, 또는 그 밖의 초인적인 영향력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 바람이나 비, 태양이나 대기를 관장하는 불덩이로 여기는 달, 또는 지신의 힘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부적이나 낡은 신발, 옷 조각을 바치며 그들에게 정성을 다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1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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