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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137

로티 벨, 선교 편지 중에서 로티 벨, 고영자&이은상 옮김, 로티 벨 선교 편지: 1895~1897> (보고사, 2022). 로티 벨은 1901년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활동이 많지 않은 인물이지만, 편지를 통해 정착하던 때의 이야기를 상세히 남겨주었다.  1. 식생활 적응 문제. 선교사 부인들이 한국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티 벨은 그래도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보이지만,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불결함에 놀라는 대목이 자주 있는데, 음식 문제도 이와 연결된다. 1895.5.26.많은 선교사 부인들이 한국 음식은 먹지 않으려고 하지만, 저는 그걸 먹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려면 음식 먹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2024. 6. 29.
유진벨, 선교 편지 중에서 유진 벨, 고영자 & 이은상 옮김,  (보고사, 2022). 전남 선교를 개척한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 로티 벨 부부의 서한이 번역되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놓는다. 1. 유진 벨이 처음 와서 서울 거처에서 열심히 한 일 중 하나는 텃밭 가꾸기였다. 평범한 장면이지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1)상관 없는 생각. 낯선 품종의 목록을 보니, 토착화라는 선교에 대한 비유가 떠오른다. 선교는 씨앗(복음)을 가져와 낯선 토양(타국 문화)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라는 비유. 의도치 않았지만 유진 벨이 처음 한 노력은 토착화였다. (2)낯선 품종의 목록은 서구식 식생활을 유지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류대영이 말한 ‘사막의 오아시스’에 거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5.4.2.. 2024. 6. 29.
여배우 밀른이 본 한국종교(1895년) 밀른(Louise Jordan Miln)의 (Quaint Korea)은 다소 낯선 책이었다. 책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Louise Jordan Miln, (London: Osgood, McIlvaine & co., 1895). 이 책의 10장은 한국의 종교에 관한 것인데, 제목이 아예 “한국의 무종교”(Korea's Irreligion)이다.(10장 내용은 첨부파일을 볼 것.) 19세기 말의 ‘종교 없음’ 서술들을 모으던 나로서는 눈에 띄는 제목. 사실 이처럼 노골적으로 종교가 없다고 말한 글도 드물다. 글은 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 문필가의 냄새가 났다. 면밀한 논증보다는 개성이 강하고 소신이 뚜렷한 문체가 흥미로운 글이다. 일반인의 시각이다 보니 오히려 당시 종교에 대한 담론을 더 잘 드러.. 2023. 6. 2.
랜디스가 채록한 한국 동요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성공회 선교사 중 한 명인 랜디스는 인천 지역에서 병원과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고아들에게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동요를 채록하여 1898년 미국 저널에 발표하였다. 수록된 지면은 다음과 같다. E. B. Landis, "Rhymes of Korean Children," The Journal of American Folklore 11-42 (1898): 203-09. 랜디스가 의례를 중시하는 성공회 선교사이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과는 달리 의례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났을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그의 글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 동요는 내 관심과는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동요 모음의 첫 두 노래가 (그가 성공회 사제로서 중시했으리라 생각하는) 의례와 사제에 대한 경멸을.. 2023. 5. 31.
로스 번역 성경의 의례, 종교 어휘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누가복음을 일독했다. 존 로스가 번역한 최초의 한글 번역 (1882)로. 폰트 상태가 조악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옛 어투가 갖는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미소가 지어지는 정겨운 호칭들이 눈에 띈다. 예수는 ‘하느님 아밤’에게 기도를 드린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 오맘’이라고 불린다. 제자들은 예수를 ‘영감’이라고 부른다. 예수와 적대적 관계였던 율법교사들은 ‘선비’라고 번역되었다. 선비라는 번역이 당시 대중들에게 갖는 효과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천사의 번역어로 사자(使者)가 종종 사용된 것도 흥미롭다. 책 끝에 번역에 사용된 신조어를 풀이해 놓은 페이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제사장으로 번역되는 제사를 이렇게 푼다. “제사는 하느님의게 제딜이넌 직.. 2023. 5. 30.
초기 구세군 선교의 영화 사용 한국의 구세군 선교는 1908년 10월 1일 호거드(허가두) 부부의 입국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환등기 상영, 즉 영화를 선교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1) 에서 첫 환등회(제등집회) 기록은 12월 5일에 나타나며, 12월 12일에는 입장료 징수를 놓고 약간의 분란(주어진 내용으로는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다)이 일어나기도 한다. 입장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영화 상영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1) 1909년의 행사부터는 일반 신문인 에도 소개된다. “구셰 환등”, , 1909.2.26. “환등 기계”, , 1909.10.14. (2-2) 동일한 행사에 대한 황성신문의 기사이다. “救世軍營幻燈”, , 1909년 02월 27일 (3)한국 구세군 개전 1주년 특.. 2023. 5. 30.
소와 송아지에게 줄 것을 빼앗음 며칠 전 의 다음 기사를 읽고 초기 기독교 선교 상황이 떠올랐다. 우유가 스테이크보다 나쁜 이유, 이런 거였어? 이 기사에서는 동물보호단체의 문구를 소개한다. “내가 아기에게 먹이려고 했던 젖을 모조리 빼앗았어요.” 우유는 소가 자신의 새끼를 먹이기 위한 젖을 강탈하여 나온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산물이 영양상으로도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 기사의 요지이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우유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우유라는 식품이 없다는 사실에 매우 낯설어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동물의 젖을 사람에 먹이는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우유라는 음식에 대한 저항감이 컸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우유 수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일정 기간 수입해서 먹어야 했다. 다음은 조선혜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사.. 2023. 5. 30.
터너 주교의 정치적 입장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의 다수는 일본의 지배를 승인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선교사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연구가 지배적이다.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서양인들이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일본의 힘의 우위를 인정한 것은 어찌 보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 한국인을 사랑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성공회의 2대 주교였던 아서 터너(한국 이름: 단아덕)에 대한 평가에도 나는 민족주의적 평가의 덧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07년부터 YMCA 회장을 역임하면서 종로YMCA 건물을 건립하는 등 기여를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을.. 2023. 5. 30.
종교로서의 애니미즘에 대한 불만족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회의 보고서 제4권에는 애니미즘 종교를 다루는 장이 있다.(이 자료를 웹상에서 볼 수 있는 곳) 이 글에서 "종교로서의 애니미즘에 대한 불만족"이라는 소절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전통에 불만족을 갖고 있는 지식인 계층(전통적인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서구적 영향에 민감한 계층)의 이야기들을 모아놓고, 그것이 선교의 좋은 기회, 혹은 선교를 위한 자원이 됨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이 선교 보고서 내용들이 한국 상황과 오버랩되어 눈에 밟히는 것은 한두 곳이 아니다. 우선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의 다양한 전통들로부터 참 비슷한 내용들을 파악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다양한 전통이 '애니미즘'이라는 단일한 표제 하에 묶인 것이 예사롭지 않거니와, 그 '어리.. 2023. 5. 30.
트롤로프의 한국 불교 이해 우리나라 성공회 주교를 역임했던 트롤로프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선교사였다. 그의 다음 글은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글이지만 이해의 깊이는 충분히 느껴진다. 1914년 글으로, 그전의 한국 불교에 대한 서양인의 논의에 비하면 한국 불교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학문적인 글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클락(Clark)이 평가했듯이(, 12), 한동안 중요한 학문적 기여를 한 글로 남아있게 된다. M. N. Trollope,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Buddhism in Corea," 8 (1917): 1-40. 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서양인의 이해의 잘못을 잡아주는 글의 도입부나, 삼귀의(三歸依)를 하나하나 설명함으로써 붓다 개념, 불교 교의, 승가 집단을 차.. 2023. 5. 29.
선교사 언더우드와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 이번에 두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을 정리해 발표한 것이다. 게일의 경우에는 전에 조사한 것을 참고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새로 구성된 내용이다. 언더우드는 잘 정돈된 연구자라고는 하기 힘들다. 독창적이지 못한 부류의 연구자는 그가 무엇을 읽고 들었는가에 따라서 주장이 확확 바뀌는데, 그런 연구자를 통해 당대의 담론의 흐름을 파악하기는 더 좋은 점이 있다. 언더우드의 관점은 “개신교적인 편견”이라고 요약될 수 있는데, 그의 서술에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편견들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 편견들 중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형성된 것들도 꽤 있을 것이다. 이번에 언더우드의 를 읽으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신학적인 종교 이론', 특히 자기의 하느님 관념에 꿰.. 2023. 5. 29.
허시모 사건 ‘허시모 사건’은 한국 기독교사 중에서 매우 자극적인 사건이었고, 사회적인 물의도 많이 일으킨 사건이다. 허시모(許時模)는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의 한국이름인데, 기독교사 책에 실린 설명에 따르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25년 여름에 자기 집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따먹은 그 지방 어린이(12세) 김명섭의 뺨 좌우에, 염산으로 ‘됴적’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한 시간 동안이나 볕에 말린 후 풀어놓았으니, 이로 인해 됴적이라는 두 글자는 영원토록 그 아이의 뺨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미국 선교사가 어린아이의 얼굴에 해놓은 짓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미제 선교사를 욕하는 북한의 출판물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가 된다. 모퉁이돌 선교회 웹 게시판에 있.. 2023. 5. 29.
120년 전에 한국에 온 애리조나 사람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은자의 나라”(the hermit nation)와 함께 개항기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구인들이 붙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명이다. 지금은 대항항공 기내지의 이름으로나 남아있는, 낭만적이면서도 지금 우리 모습과는 동떨어진 이름이지만,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머릿속에는 극동에 있는 정체된 작은 나라라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저서는 퍼시벌 로웰의 (1888)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중요하다. 우리나라 이미지를 생성하여 유포시킨 책이라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로웰이 개항 초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고종의 어전을 처음으로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옮긴이 조경철 박사가 그런 책을 19.. 2023. 5. 20.
제국주의, 술, 복음 1910년 선교 대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선교사 애비슨(O. R. Avison)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기독교 선교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보고하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 사역에서 일본의 영향과 연관되는 위험은 다음과 같다. 만일 선교사들이 일본과 협력하면, 일본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한국 백성의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일본 맥주와 위스키가 엄청난 양으로 수입되어 왔으며, 술의 소비가 그에 따라 급증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런 습관은 복음 전파에 반대가 되고 있으며, 이 시점의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애비슨이 에딘버러 선교대회(1910)를 위해 작성한 보고서. 안교성,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를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제국주의와 .. 2023. 5. 19.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 대부분의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일제에 관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입장이었지만, 수뇌부의 선교사 중에는 일본에 대놓고 우호적인 이들이 있었다. 한일병합 당시에 한국과 일본 양국 감리교 감독이었던 해리스는 친일적인 성향을 가진 이였다. 그가 당시 일본에서 했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요즘 어떤 신문은 내가 합병론 찬성자인 것처럼 전하지만, 이것은 나의 진의를 오해한 것이다. 나는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진 한일 합동의 정책을 기독교주의의 견지에서 주장했을 뿐, 하등의 정치적 의미는 없었다. 내가 열망하는 바는 한국인의 안녕과 행복에 있다. 내가 한국에서 인민에게 말했던 것은 한일 양국이 잘 접근하여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한국의 지도자임은 하늘의 섭리라 해야겠다. .. 2023.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