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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제국주의, 술, 복음

by 방가房家 2023. 5. 19.

1910년 선교 대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선교사 애비슨(O. R. Avison)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기독교 선교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보고하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 사역에서 일본의 영향과 연관되는 위험은 다음과 같다. 만일 선교사들이 일본과 협력하면, 일본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한국 백성의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일본 맥주와 위스키가 엄청난 양으로 수입되어 왔으며, 술의 소비가 그에 따라 급증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런 습관은 복음 전파에 반대가 되고 있으며, 이 시점의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애비슨이 에딘버러 선교대회(1910)를 위해 작성한 보고서. 안교성,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를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제국주의와 종교의 관계를 논하다가 술 걱정이라니, 그래서인지 발표자께서는 “이런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 위협적인 것은 일본 제국주의보다 차라리 일본 술인 셈이다.”라고 논평하고 넘어가셨다. 제국주의와 술 문제를 동등하게 논한 이 이야기는 선교사들이 제국주의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사례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보기보다는 진지한 면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술 문제는 제국주의라는 논점에서 이탈한 소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일제는 우리나라 술 문화를 산업화하였는데, 이는 일제의 주세법에 의해 일어난 변화이다. 관련된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세법은 1909년 대한제국에 의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 때 제정된 주세법은 실제로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술의 생산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였다. 
본격적인 주세법의 발효는 1916년 총독부 당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기존의 주세법을 고쳐서 ‘주세령(酒稅令)’으로 발효된 당시의 시행령은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던 술 제조까지 면허를 얻도록 했다. 그 후 주세령은 1919, 1920, 1922, 1927, 1934년의 5차에 걸쳐 개정되었고, 주세에 의한 착취가 점점 엄밀해져서 개인적인 용도로 만드는 술의 면허마저 극도로 제한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32년 개인적인 용도로 술을 만들겠다고 면허를 신청하여 허가를 받은 사람이 단 1명밖에 없었고, 그것마저 1934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주영하, “음식과 식민주의 : 외래문화가 음식민속에 끼친 영향”)
 
술 생산에 대한 국가적 통제, 가정 영역의 술 제조가 금지되고 산업 영역의 술 제조가 개시된 것, 그럼으로써 술은 만드는 것에서 사먹는 것이 되었고 술 생산량이 급증한 것, 그래서 술 판매에서 나오는 세금이 총독부 재정에 큰 몫을 하였다는 것이 주된 맥락이다. 설명하기 쉽지는 않지만, 술 제작이 단순히 가정의 영역에서 산업의 영역으로 가시화된 것만이 생산량 급증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 수 있다. 이 가시화를 통해 우리나라가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고 실제적인 술 소비량이 급증한 것으로 알고 있다.[이 내역을 잘 정리한 연구가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다.]
이러한 술 문화의 변화가 1910년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애비슨 선교사의 보고와 상관 없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애비슨이 언급한 “일본 맥주와 위스키의 수입”이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온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에서 한 번 더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싼 재래식 소주는 점차 사라지고 재래식 소주에 에틸 알코올을 섞어 만드는 개량식 소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이 알코올 소주는 이미 1897년에 인천과 원산을 중심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주정(酒酊) 형태로 일본에서 수입된 알코올 소주는 당시 재래식 소주에 섞어서 술의 양을 늘리고 판매 가격을 내리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주정 덕택에 소주의 값이 내리고 소주는 예전에 비해 더욱 대중화되었다. 
(주영하, “음식과 식민주의 : 외래문화가 음식민속에 끼친 영향”)
 
소주의 초기 역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현재 우리가 먹는 ‘희석식 소주’는 1965년 이후에 정착되었다고 한다) 애비슨이 일본 위스키라고 부른 것은 아마 소주 주정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애비슨의 지적은 중요한 것이었다. 일본 술의 수입은 지배 이후 한국을 거대한 술 소비시장으로 변화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구상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애비슨은 그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후 한국 사회에서 술은 사회의 대동맥과 같은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고 그것이 기독교에 막강한 저항세력이 되었음을 생각한다면(다음글 참조: 기독교와 술3), 애비슨은 거의 예언에 가까운 통찰력을 보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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