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일제에 관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입장이었지만, 수뇌부의 선교사 중에는 일본에 대놓고 우호적인 이들이 있었다. 한일병합 당시에 한국과 일본 양국 감리교 감독이었던 해리스는 친일적인 성향을 가진 이였다. 그가 당시 일본에서 했던 인터뷰 중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요즘 어떤 신문은 내가 합병론 찬성자인 것처럼 전하지만, 이것은 나의 진의를 오해한 것이다. 나는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진 한일 합동의 정책을 기독교주의의 견지에서 주장했을 뿐, 하등의 정치적 의미는 없었다. 내가 열망하는 바는 한국인의 안녕과 행복에 있다. 내가 한국에서 인민에게 말했던 것은 한일 양국이 잘 접근하여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한국의 지도자임은 하늘의 섭리라 해야겠다. 일본의 도움을 배척함은 한국을 위하여 결코 득책이 아니다. 나는 복음의 입장에서 구래의 양국 소격의 정폐를 타파하고 정신적으로 합동함으로써 한국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엠. 씨. 해리스, “해리스 감독의 한국에 대한 의견,” <<護敎>> 제964호(1910년 1월 15일). 김승태,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과 선교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289회 학술발표회)에서 약간 수정해서 재인용함.]
그의 친일적 성향에 대해서야 재론할 필요가 없고, 내 눈을 끄는 것은 그런 그가 자신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의 ‘진의’ 가 기독교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로 그의 자의식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의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은 정교분리의 입장을 가져야 하는 선교사로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적인 것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이것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나만 해도 내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진실로 믿고 행동하는 경험을 많이 해보았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좋은 거짓말쟁이(혹은 사기꾼)이 되는 길은 자신의 구라를 ‘진심으로’ 믿는 것이다. 그럴 때 거짓말탐지기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 동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자. 변명을 되풀이하다보면 그것은 어느 순간 진심이 되어버린다. 어디까지가 핑계의 영역이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진심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지 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자신의 말에서도 그것이 변명인지 진심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데, 역사 자료에서 그것을 가려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현재 자신의 통치 행위가 정치가 아니라고 믿는 위정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정치 아님을 호언하는 이러한 언술에도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분은 그렇다고 믿고 있는 걸까, 우기는 걸까? ‘진의’는 무엇일까?
내가 만일 정치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사회적 행위들은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런 나랏님의 언사에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까 상상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낯선 것은 아니다. 혹시 “우리가 믿는 것은 진리이지 종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교회의 논리(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에서 배운 것은 아닐까?
내가 만일 정치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사회적 행위들은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런 나랏님의 언사에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까 상상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낯선 것은 아니다. 혹시 “우리가 믿는 것은 진리이지 종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교회의 논리(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에서 배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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