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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278

북한산 한 절에서 있었던 만남(1891) 성공회 초기 선교 때 있었던 불교와의 만남 이야기. 성공회 한국선교 기관지인 모닝캄>(Morning Calm) 17호(1891.11.)에 실린 글이다. 훗날 강화도 선교를 개척한 워너(L. O. Warner)가 북한산성 일대를 여행하다가 한 절에서 숙박한 체험을 담은 글이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한국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 다른 개신교와는 차이를 보인다고 느꼈는데, 이 글에서 그러한 면모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의 글에서 한국종교에 관한 언급이 세 번 나오는데, 그중 그가 절에 하룻밤 묵으며 승려들과 교류한 대목이 가장 흥미롭다. 글의 일부이다. 워너(L. O. Warner), “불교 사원에서 보낸 하룻밤”(A Night in a Buddhist Monastery)원문은 아래 링크의 5-9쪽.. 2024. 7. 12.
벨 부부의 삼막사 휴양 벨 부부가 1895년, 1896년에 여름 휴양지로 간 곳은 관악산(삼성산) 삼막사였다. 서양인의 바캉스 개념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그들이 초기에 택한 휴양 장소가 절이었기에 선교사와 불교의 흥미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다음은 유진 벨의 기록이다. 다음 긴 기록에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그들은 템플스테이가 아니라 휴양을 간 것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막대한 준비물을 가져갔고, 한국인 짐꾼과 하인이 동반되었다. (2)절을 선교사 숙소로 개조하기 위해 꽤 품을 들었다. 가람 훼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어떻게 개조했는지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3)절은 종교공간이 아니라 휴양지였다. 거기서 행해지는 예불/우상숭배는 휴식에 방해되는 일일 뿐. 그래도 묘한 공존이 이루어.. 2024. 7. 1.
로티 벨, 선교 편지 중에서 로티 벨, 고영자&이은상 옮김, 로티 벨 선교 편지: 1895~1897> (보고사, 2022). 로티 벨은 1901년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활동이 많지 않은 인물이지만, 편지를 통해 정착하던 때의 이야기를 상세히 남겨주었다.  1. 식생활 적응 문제. 선교사 부인들이 한국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티 벨은 그래도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보이지만,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불결함에 놀라는 대목이 자주 있는데, 음식 문제도 이와 연결된다. 1895.5.26.많은 선교사 부인들이 한국 음식은 먹지 않으려고 하지만, 저는 그걸 먹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려면 음식 먹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2024. 6. 29.
유진벨, 선교 편지 중에서 유진 벨, 고영자 & 이은상 옮김,  (보고사, 2022). 전남 선교를 개척한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 로티 벨 부부의 서한이 번역되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놓는다. 1. 유진 벨이 처음 와서 서울 거처에서 열심히 한 일 중 하나는 텃밭 가꾸기였다. 평범한 장면이지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1)상관 없는 생각. 낯선 품종의 목록을 보니, 토착화라는 선교에 대한 비유가 떠오른다. 선교는 씨앗(복음)을 가져와 낯선 토양(타국 문화)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라는 비유. 의도치 않았지만 유진 벨이 처음 한 노력은 토착화였다. (2)낯선 품종의 목록은 서구식 식생활을 유지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류대영이 말한 ‘사막의 오아시스’에 거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5.4.2.. 2024. 6. 29.
여배우 밀른이 본 한국종교(1895년) 밀른(Louise Jordan Miln)의 (Quaint Korea)은 다소 낯선 책이었다. 책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Louise Jordan Miln, (London: Osgood, McIlvaine & co., 1895). 이 책의 10장은 한국의 종교에 관한 것인데, 제목이 아예 “한국의 무종교”(Korea's Irreligion)이다.(10장 내용은 첨부파일을 볼 것.) 19세기 말의 ‘종교 없음’ 서술들을 모으던 나로서는 눈에 띄는 제목. 사실 이처럼 노골적으로 종교가 없다고 말한 글도 드물다. 글은 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 문필가의 냄새가 났다. 면밀한 논증보다는 개성이 강하고 소신이 뚜렷한 문체가 흥미로운 글이다. 일반인의 시각이다 보니 오히려 당시 종교에 대한 담론을 더 잘 드러.. 2023. 6. 2.
주술의가 되었던 탐험가, 카베사 카베사 데 바카(Alvar Núñez Cabeza de Vaca)는 스페인 원정대의 일원으로 아메리카 탐험에 참여하였다가 1528년 지금의 플로리다 지역에 난파당한 사람이다. 그 이후 8년 동안 그는 북미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는 북미 원주민들의 무리의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었으며, 그들과 어울려 지금의 뉴멕시코 지역까지 걸어서 이동하였고, 결국 멕시코 지역에서 스페인 원정대를 만나 돌아오게 된다.(그가 여행한 지역에 대해서는 아래의 지도를 클릭해서 확인해볼 것) 그는 거의 원주민 사회의 일원이 되다시피 생활하면서 경험한 일을 후에 책(Naugragios)으로 출판하는데, 이 책은 유럽에서 여행기로 인기를 끌어왔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당시의 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를 갖는다... 2023. 6. 1.
랜디스가 채록한 한국 동요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성공회 선교사 중 한 명인 랜디스는 인천 지역에서 병원과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고아들에게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동요를 채록하여 1898년 미국 저널에 발표하였다. 수록된 지면은 다음과 같다. E. B. Landis, "Rhymes of Korean Children," The Journal of American Folklore 11-42 (1898): 203-09. 랜디스가 의례를 중시하는 성공회 선교사이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과는 달리 의례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났을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그의 글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 동요는 내 관심과는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동요 모음의 첫 두 노래가 (그가 성공회 사제로서 중시했으리라 생각하는) 의례와 사제에 대한 경멸을.. 2023. 5. 31.
로스 번역 성경의 의례, 종교 어휘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누가복음을 일독했다. 존 로스가 번역한 최초의 한글 번역 (1882)로. 폰트 상태가 조악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옛 어투가 갖는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미소가 지어지는 정겨운 호칭들이 눈에 띈다. 예수는 ‘하느님 아밤’에게 기도를 드린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 오맘’이라고 불린다. 제자들은 예수를 ‘영감’이라고 부른다. 예수와 적대적 관계였던 율법교사들은 ‘선비’라고 번역되었다. 선비라는 번역이 당시 대중들에게 갖는 효과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천사의 번역어로 사자(使者)가 종종 사용된 것도 흥미롭다. 책 끝에 번역에 사용된 신조어를 풀이해 놓은 페이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제사장으로 번역되는 제사를 이렇게 푼다. “제사는 하느님의게 제딜이넌 직.. 2023. 5. 30.
북쪽과 연관해서 언급되는 성서 구절들: 북방왕, 좌향군, 붉은 군대 나운몽 장로의 1970년대 글에서 발췌한 내용. 북한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것으로 읽히는 성서 구절들이 나열되어 있다. 한국 교회에서 많이 사용될 만한 구절이고, 현재처럼 남북관계가 엉망일 때 다시 언급될만한 구절들이라 생각된다. 다니엘은 예언하기를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력의 신’을 공경하는 자들이 세계를 나눠서 북방왕과 남방왕이 대결하게 될 것인데 그때에는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처음에는 강하나 점점 쇠약해지리라고 하였고(단 11:22-40) 에스겔은 우향군과 좌향군으로 나뉘어 번개같은 무기로 싸워 세계대전이 세 번 있을 것인데(겔 21:14-16) 극한 북방에서 ‘곡’의 후손들이 엄습해오리라고 예언하였고(겔 38:15) 나홈 선지는 파괴주의자들이 붉은 군대를 이끌고 횃불같고 번개같은 병기를 갖.. 2023. 5. 30.
금주에 대한 한 신자의 반론(1903) 감리교회에서 발행한 1903년 4월호에 평남 강서군 함종읍에서 김주련이라는 30년 된 천주교신자가 개신교로 개종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주련의 개종에서 가장 큰 관건은 금주 문제였다. 그는 사경회에 참석하여 금주 문제에 대해 치열한 문답을 주고받는다. 초기 기독교 금주 관련 자료 중에서도 애주가의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난 재미있는 문답이다. 6개의 문답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문: 아무리 술을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 답: 사소한 술도 못 끊는데 어떻게 더 큰일을 하겠는가. (2)문: 술을 안 먹으면 죽을 것 같다. 밥 안 먹으면 죽지만 술 안 먹는다고 죽지 않는다. 또 죽는다 해도 죄 짓고 사는 것보다는 죄 없이 죽는 게 낫다. 1, 2번은 인간적 정서에 호소하는 동시에 현실적.. 2023. 5. 30.
초기 구세군 선교의 영화 사용 한국의 구세군 선교는 1908년 10월 1일 호거드(허가두) 부부의 입국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환등기 상영, 즉 영화를 선교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1) 에서 첫 환등회(제등집회) 기록은 12월 5일에 나타나며, 12월 12일에는 입장료 징수를 놓고 약간의 분란(주어진 내용으로는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다)이 일어나기도 한다. 입장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영화 상영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1) 1909년의 행사부터는 일반 신문인 에도 소개된다. “구셰 환등”, , 1909.2.26. “환등 기계”, , 1909.10.14. (2-2) 동일한 행사에 대한 황성신문의 기사이다. “救世軍營幻燈”, , 1909년 02월 27일 (3)한국 구세군 개전 1주년 특.. 2023. 5. 30.
소와 송아지에게 줄 것을 빼앗음 며칠 전 의 다음 기사를 읽고 초기 기독교 선교 상황이 떠올랐다. 우유가 스테이크보다 나쁜 이유, 이런 거였어? 이 기사에서는 동물보호단체의 문구를 소개한다. “내가 아기에게 먹이려고 했던 젖을 모조리 빼앗았어요.” 우유는 소가 자신의 새끼를 먹이기 위한 젖을 강탈하여 나온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산물이 영양상으로도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 기사의 요지이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우유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우유라는 식품이 없다는 사실에 매우 낯설어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동물의 젖을 사람에 먹이는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우유라는 음식에 대한 저항감이 컸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우유 수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일정 기간 수입해서 먹어야 했다. 다음은 조선혜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사.. 2023. 5. 30.
터너 주교의 정치적 입장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의 다수는 일본의 지배를 승인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선교사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연구가 지배적이다.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서양인들이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일본의 힘의 우위를 인정한 것은 어찌 보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 한국인을 사랑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성공회의 2대 주교였던 아서 터너(한국 이름: 단아덕)에 대한 평가에도 나는 민족주의적 평가의 덧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07년부터 YMCA 회장을 역임하면서 종로YMCA 건물을 건립하는 등 기여를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을.. 2023. 5. 30.
초기 한국 천주교 자료의 엑소시즘 영화 를 보다가 이전에 메모해 둔 한국 자료들을 떠올렸다. 20세기초 천주교 자료에서 봐둔 귀신 쫓는 이야기였는데, 이번에 보니 자료의 구체적인 장면들이 영화의 엑소시즘 장면과 겹쳐지는 것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공식적인 엑소시즘의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루어진 ‘귀신과의 만남’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아래 자료에서 나온 축귀들이 교구에 제대로 보고되고 또 인가를 받아 행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해본다. 또한 아래 사례들에는 서구 엑소시즘의 전형을 닮은 부분과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 개념이 혼재되어 있어서 주의 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평신도의 차원에서 이들은 엄연한 천주교 축귀로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1) 1906년.. 2023. 5. 30.
초기 개신교의 전보 이미지 지금 읽고 있는 자료에서 ‘전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바람에 어제 글에 이어서 다시 전보에 관련된 내용을 메모해 둔다. 자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최병헌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을 참조할 것)이다. 책은 1912년에 출판되었지만 내용은 1907년에 에 연재했던 것이니 1907년 글로 보아도 무방하다.이 책은 개신교인과 전통 종교들의 대표자들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화는 주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다. 이 내용은 유학을 공부했던 저자 최병헌이 기독교인으로 되기까지의 내적인 고민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형식은 대화이지만 사실상 고리타분한 유교를 벗어나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강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기독교 입장에서 유교를 공격하는 맥락에서 아래 인용.. 2023.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