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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초기 개신교의 전보 이미지

by 방가房家 2023. 5. 30.

지금 읽고 있는 자료에서 ‘전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바람에 어제 글에 이어서 다시 전보에 관련된 내용을 메모해 둔다. 자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최병헌의 <<성산명경>>(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을 참조할 것)이다. 책은 1912년에 출판되었지만 내용은 1907년에 <<신학월보>>에 연재했던 것이니 1907년 글로 보아도 무방하다.이 책은 개신교인과 전통 종교들의 대표자들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화는 주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다. 이 내용은 유학을 공부했던 저자 최병헌이 기독교인으로 되기까지의 내적인 고민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형식은 대화이지만 사실상 고리타분한 유교를 벗어나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강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기독교 입장에서 유교를 공격하는 맥락에서 아래 인용문이 등장한다.

진도眞道(유학자): 나도 서국西國 예수교의 말을 들었거나와 허탄하고 맹랑한 이치밖에 말이 많은지라. 자공이 가라대 공자께서 성품과 천도를 의론하심은 듣지 못하였다 하고, 자로[가] 죽는 것을 묻자온대 공자 가라사대 ‘네가 사는 이치도 모르거든 어찌 죽는 것을 알리요’ 하셨으니 하늘도와 죽는 것은 공자도 말씀하신 곳이 없거늘 누가 능히 하늘도 알며 천당과 지옥은 누가 보았느뇨.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부터 허황한 말이라. 하느님이 사람이 아니거늘  어찌 아들이 있으며 예수를 믿는 자 아버지도 하느님 아버지라 하고 아들도 아버지라 하고 손자도 아버지라 하니, 그의 촌수를 누가 알며 예수가 유태국에 나신 것은 누가 절실히 아느뇨? 그대같은 소년은 침혹沈惑하기 쉽거니와 지각 있는 사람과 글을 읽은 선비들이야 누가 그까짓 허탄한 일과 이치 밖의 말을 믿겠소?
 
신천옹信天翁(개신교인): 선생이 이치 밖의 말이라 말씀하셨는데, 물고기와 날짐승의 새끼치는 이치를 아십니까?
 
진도: 비조飛鳥와 수족水族이 다 난육卵育하는 것이오.
 
신천옹: 각색 비조들이 다 알로 새끼를 치되 학鶴이란 새는 태胎로 자식을 낳고 물고기가 다 알을 수초에 슬어 적은 고기들이 알속에서 나올 때에 어미된 고기가 그 자식과 상관이 없거늘 그중에 고래라 하는 고기는 그 자식을 태로 낳고 또한 자식을 대단히 고호顧護하여 사람이 만일 그 자식을 잡고자 하면 제 몸이 죽어도 기어이 그 자식을 해치지 못하게 하니 선생은 다만 한가지만 아는 까닭에 학과 고래의 자식 낳음은 반드시 이치 밖이라 하시겠습니다.
 
진도: 학을 태금胎禽이라 함은 들었지만 고래가 자식을 태생胎生함은 처음 듣는 말이오.
……
신천옹: 몇십년 전에 선생이 만일 서양 제국에 들어가 전보학電報學을 졸업하고 돌아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철사 하나만 공중에 매고 보면 만리 밖의 소식을 삽시간에 통할 것이오, 몇 천리 밖에 서로 말씀을 듣고 수작하며 철사가 없이도 소식을 통하는 법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선생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반드시 반대하면서 “천리마가 있다고 해도 천리 밖의 일은 하루 만에 통할 것이며 사람이 백보 밖에서도 말을 서로 듣기 어렵거늘 어찌 만리에 소식을 삽시간에 알며 천리 밖의 말씀을 서로 듣겠는가.” 하며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치가 있다 함은 전보학 공부를 졸업함이요, 그 이치가 없다 함은 전보선과 전화기를 보지 못한 연고입니다. 오늘날 선생이 천당 지옥이 없다 하며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함이 어찌 전보학을 모르고 영통함이 이치 밖이라 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최병헌, <<셩산명경>>(조선예수교서회, 1912), 22-24. (현대어 표기로 고침)
 
유학자가 기독교 가르침이 유학의 이치 밖의 것이라고 하자, 개신교인 신천옹이 그에 대한 반론을 장황하게 펼치는 장면이다. 그 반격의 실마리를 ‘물고기와 날짐슴의 새끼치는 이치’라는 자연과학적인 상식으로부터 잡는 것이 흥미롭다. 그는 물고기와 새가 모두 알을 낳는 게 아니라 예외도 있다고 우기면서 니가 뭘 아느냐고 펀치를 날리고, 이에 유학자는 움츠려든다. 그런데 신천옹의 ‘과학상식’은 이상하다. 학이 수태를 한다는 것은 엉터리 지식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이리저리 검색을 해서 얻은 짧은 지식으로 유추하면 다음과 같다.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학의 다른 이름 중에서 태금(胎禽)이란 것이 있다. <<상학경>>이라는 책에서 “학은 암수가 서로 만나 정하게 주시만 해도 새끼를 잉태한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신천옹은 ‘태금’이라는 이름을 ‘태에서 낳는 짐승’이라는 뜻으로 잘못 유추해서 그렇게 우긴 것 같다. 또한 포유류인 고래의 예를 들어서 태에서 낳는 물고기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범주 설정의 오류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양선교사를 통해 과학지식을 공급받고 있는 것은 개신교 쪽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갖고 먹혀들었다는 점이다. 
신천옹의 주장에 서양문명이라는 배경이 있음은 그가 전보를 들이대는 그 다음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전보라는 신기술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새로운 지식의 일환으로 기독교 교리를 내세운다. 신천옹은 전보 이야기를 계기로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며, 유학자 진도는 이에 설복당하기에 이른다. 유학의 인식 범위 밖에 새로운 진리가 존재한다는 이러한 화법은 논리상 잘못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워도, 지금 입장에서 보면 오버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맞지도 않는 과학지식에다가 통신기술을 들먹이며 ‘니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데...’하며 윽박지르는 것은 요즘 초딩의 말싸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이 이야기가 상대방을 움츠려들게 하고 대화의 구도를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전신은 1850-60년대에 유행하였고 그 유행에 심령술의 두드림이 함께 했음을 앞글에서 이야기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85년에 전신이 처음으로(위의 사진은 1910년의 모습), 1906년에 전화가 처음으로 개통되었기 때문에(궁중에 전화가 설치된 것은 1896년, ‘덕률풍’에 관한 한성순보 기사를 볼 것), 이 글이 쓰여진 1907년의 시점에서는 새로운 기술로서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새로운 통신 기술과 새로운 진리의 동일시, 그것은 20세기초 한국종교문화에 존재했던 강력한 은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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