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세군 선교는 1908년 10월 1일 호거드(허가두) 부부의 입국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환등기 상영, 즉 영화를 선교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1) <한국구세군 연혁>에서 첫 환등회(제등집회) 기록은 12월 5일에 나타나며, 12월 12일에는 입장료 징수를 놓고 약간의 분란(주어진 내용으로는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다)이 일어나기도 한다. 입장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영화 상영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1) 1909년의 행사부터는 일반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에도 소개된다.
“구셰 환등”, <대한매일신보>, 1909.2.26.
“환등 기계”, <대한매일신보>, 1909.10.14.
(2-2) 동일한 행사에 대한 황성신문의 기사이다.
“救世軍營幻燈”, <皇城新聞>, 1909년 02월 27일
(3)한국 구세군 개전 1주년 특별 행사에 대한 소식도 <대한매일신보>(1909.9.30.)에 나타난다. 환등회 사용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 구셰군영에셔 오난 十월 二일노 六일까지 도한한 긔념례식 총회를 할터인대 二일은 환등회오 三일은 음악회오 四일은 총회오 五일은 명년도에 할 사업연구회를 한다더라.”
(4) 1909년 10월 행사에 대한 기사이다.
“구셰영 개회”, <대한매일신보>, 1909.10.29.
“야쥬개 구셰군영에셔 명일[1909년 10월 30일, 토요일] 하오 七시에 환등회를 하고”
(5) 1909년 5월에 사령관이 로드(H. Lord) 정위와 함께 한강 건너 송파에 가서 ‘환등회’를 개최하고 전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H. Lord, "Korea: A Visit to Song Pa", All the World, Aug. 1910, 403-405쪽; “허정령 송파전왕”, <구셰신문> 4호, 1910.6.
(6) 1911년 성탄절에 특별 행사가 준비된다. ‘예수의 일생’이라고 영화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12월 20일부터 23일까지 영문을 각색 등(燈)과 만국기로 장식하고 연단을 첫 성탄 모습으로 꾸몄다. 본격적인 행사는 12월 23일 저녁 ‘예수의 일생’을 내용으로 한 환등회로 시작되었는데 2백 명이 참석하였고 12월 24일 주일에는 허가두 사령관이 3차에 걸쳐 집회를 인도하엿던 바 밤 집회에만 3백여 명이 참석하여 5, 6명 회개인이 나왔다.”
"Notes and Personals", KMF Feb. 1911. 34쪽.
구세군 선교의 영화 사용은 본국의 방침과 직접 관련이 있다. 다음 논문에 따르면 구세군은 출범 당시부터 영국 노동계급 선교를 위하여 대중적 매체의 사용에 적극적이었다. 브라스밴드의 활용이 대표적인 예이다. 영화가 발명된 직후 구세군은 이 매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자체 스튜디오를 갖고 영화를 제작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영화들은 별로 없지만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10년 이후 기독교계에서는 영화의 선정성을 이유로 검열 운동을 벌이게 된다. 구세군도 이러한 반영화적 태도에 영향을 받아 1912년 이후에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1908-10년에 영화 상영에 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있는 것은 본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확인해 볼 일이다.
(또한 정동에 있는 구세군 역사박물관에는 옛날에 쓰던 환등기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보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DEAN RAPP, "The British Salvation Army, the Early Film Industry and Urban Working-Class Adolescents, 1897–1918," <Twentieth Century British History> 7-2 (January 1, 1996): 15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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