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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허시모 사건

by 방가房家 2023. 5. 29.

‘허시모 사건’은 한국 기독교사 중에서 매우 자극적인 사건이었고, 사회적인 물의도 많이 일으킨 사건이다. 허시모(許時模)는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의 한국이름인데, 기독교사 책에 실린 설명에 따르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25년 여름에 자기 집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따먹은 그 지방 어린이(12세) 김명섭의 뺨 좌우에, 염산으로 ‘됴적’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한 시간 동안이나 볕에 말린 후 풀어놓았으니, 이로 인해 됴적이라는 두 글자는 영원토록 그 아이의 뺨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미국 선교사가 어린아이의 얼굴에 해놓은 짓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미제 선교사를 욕하는 북한의 출판물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가 된다. 모퉁이돌 선교회 웹 게시판에 있는 글(교회사를 잘 아는 이의 글이라고 생각된다)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요즘의 안티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소재가 되리라.)
김일성 저작 선집과 1982년 12월에 발행된 천리마를 보면 『지난날 선교사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어들었던 미제 승냥이 놈이 조선의 한 어린이가 사과밭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을 주었다고 하여 그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새겨놓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것이 미제 침략자들의 승냥이의 본성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흡혈귀로 표현된 이유에 대해 1992년 귀순한 강 봉학은 그의 저서『동토의 땅에서 원쑤의 나라로』에서 어떤 아이가 선교사의 과수원에서 떨어진 사과 한 개를 주웠는데 그것을 목격한 선교사가 개를 풀어서 아이를 추격한다. 결국 아이는 잡히면서 개에게 심하게 물어 뜯긴다. 그것도 모자라 선교사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 놓고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겨놓는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규무의 <‘허시모 사건’의 경위와 성격>이라는 논문은 이 사건을 당시 자료들을 통해 재구성하고 사회적 파장이 일어난 과정을 살피는 글이다. 기독교사에서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이 사건을 제대로 다룬 논문 한 편 없었음을 감안할 때, 이 논문은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소 잘못 알려지거나 과장된 내용이 많다는 관점에서 사건을 추적한다. 저자의 그러한 지적에 유의하며 내가 이 글에서 새로 얻게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허시모가 ‘도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은 이마가 아니라 양쪽 뺨이며, 그냥 염산이 아니라 초산은을 사용하였다. 초산은은 염산에 비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이것은 허시모가 글씨를 일시적으로만 남겨두려한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처음에 명섭이를 잡았을 때, 허시모는 부모를 불러 돈 5원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2원 벌금에 2주간 노동을 제안하였고, 2원 마저도 낼 형편이 안 되자 대신에 ‘도적’이라는 문자를 새기기로 합의한다. 글자는 몇 주 후에 소멸될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서.
3. 위의 세부적인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허시모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실제로 명섭이 뺨의 글자는 잘 지워지지 않았고, 이에 대해 허시모는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등 이물질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을거라고 발뺌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허시모는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나중에 문제가 커지자 사과문을 내기는 했지만 재판 진행 중에 피해자측과 몰래 합의를 봐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4. 이 사건은 1925년 9월 경에 일어났으나,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26년 6-7월경으로, 이 때 일반 신문들에서 대서특필함으로써 재판이 진행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사회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한국기독교계의 입장 표명은 거의 없었다. 안식교회가 주류 교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른 척 했을 공산이 크다.

1920년대 중반은 기독교가 문명국의 종교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잃어버리고, 그저 하나의 보수적인 세력으로서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반기독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러한 시기에 터진 사고에 대한 교계의 뻣뻣한 태도는 요즈음의 교회 모습과 많이 겹쳐진다. 요즘과 같이 교회 인구가 정체되어 있고, 여러 사안에서 사회적인 비판에 직면한 시점에서, 1920년대의 교회사에서 시사받을 것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넓게 보면, 이것은 서구의 죄 개념이 우리나라의 서리 문화와 충돌한 사건이다. 허시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아야 알겠지만, 그는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그는 절도라는 범죄는 응징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죄에는 상응하는 배상이 있어야 하며, 그 배상이 돈으로 지불되지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미국적인 사고를 실천하였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애가 상처를 잘못 덧대는 바람에 흉이 남은 것이고. 그의 세계관은 우리나라 서리 문화에서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죄개념과 충돌하였다. 우리에게도 절도라는 개념은 고조선부터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용되는 방식, 거기서 나타나는 유들이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죄란, 절대적인 도덕 명제이기에 앞서 사회적인 합의인 것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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