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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누구든지 무엇인가 가르쳐줄 수 있다

by 방가房家 2023. 4. 27.

에코의 <<논문 작성법 강의>>에는 갑자기 ‘학문적인 겸손’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제목만 보면 에코 분위기와는 다른 내용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역시 그는 하나마나한 훈계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다음은 그의 체험에서 비롯한 조언이다.

어느 날 파리의 어느 책 손수레에서 필자는 조그마한 책자 하나를 발견하였다.……그 책은 발레라는 어느 수사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있어서 아름다움의 개념>>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필자는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레 수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되풀이할 뿐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한 불쌍한 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자가 그 책을 계속 읽은 것은 ‘학문적인 겸손’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집 때문이었고 필자가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계속 읽었고, 어느 지점에선가 거의 괄호 안에 들어있듯이 아마도 그 수사가 자기 주장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무심결에 쓴 듯한 언급을, 즉 아름다움의 이론과 관련된 판단의 이론에 대한 언급을 발견하였다. 그건 계시였다! 그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그 불쌍한 발레 수사가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백여 년 전에 죽었고 아무도 그에 대해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에게 무언인가 가르쳐줄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학문적 겸손이다.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줄 수 있다. 아마도 우리들 자신이 현명하다면 우리보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무언인가 배울 수 있다.……필자는 그 사건에서, 학문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원칙적으로 어떠한 출전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옮김, <<논문 작성법 강의>>(열린책들, 1994), 204-5.]

논문을 준비하다보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되풀이할 뿐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한 불쌍한” 글들도 읽게 된다. 일반적인 관심을 갖고 읽은 글이었다면 그 학자를 욕하고 글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문 준비를 위해 읽고 있다면 태도가 달라진다. 글에서 다루는 내용이 내가 관심 있는 것과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글을 대하면, 반드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그 글에서 배열된 자료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지 못한 연결들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괄호 안에 들어있듯이” 숨겨진 내용들이 나타나듯이. 이 계시는 글쓴이의 의도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보면 나처럼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에코가 말한 겸손의 의미를 알아가게 된다. 누군가가 나의 관심사에 대해 앞서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논문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논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일 뿐이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면 반드시 그랬던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작업과 오버랩이 되어 예기치 못했던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는 항상 스승이 있다는 태도, 논문을 준비하다 보면 생기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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