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부분이 있어 선생님의 옛 글을 찾아보았다.
정진홍, “토템과 마나의 예수”, <<기독교사상>> 217호(1976년 7월): 54-58. (이 글은 후에 <<한국 종교문화의 전개>>(1986)에 수록된다.) 파일: Totem_Mana_Jesus.pdf
종교학 용어 셋을 인상적으로 사용해서 한국의 예수 이미지가 정립되지 않았음을 비판하는 글이다. “교회 안에서 토템이 되어버린 예수상, 신학에 의해서 터부가 된 예수상, 그리고 신도들에 의하여 마나로 화해진 예수상”(58)이 그 내용이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 토템의 기치를 휘두르며 세상-다른 토템-과 스스로를 구분하는 열심 속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신학은 교회와 신도들을 질책하는 오만한 자리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터부화시켰으며, 신도들은 제각기의 삶의 자리에서 부적처럼 지녀진 예수의 상을 그려놓는 데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56)
내가 찾았던 내용은 그 중에서 세 번째, 마나로서 인식된 예수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는 신자들에 의하여 살아있는 힘, 곧 마나로 기능하고 있다. 예수는 적어도 그것이 모든 만물 속에, 살아있는 영이기 때문에 나의 생사화복과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그는 토템도 아니고 터부도 아니다. 내게 화를 미칠 수도 있고 복을 줄 수도 있는 구체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그는 찬양의 대상도 외경의 대상일수도 없다. 어떻게 그 영의 비위를 맞추고 어떻게 그 예수의 힘을 이용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 습득해야 할 기술이 어떤 것인가를 모색해 간다. 적절히 이용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이게 작용하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그 예수가 힘이 없으면, 이미 그것은 마나를 상실한 아니마[이 단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일 수밖에 없다. 예수를 버리는 데서 인간적인 연민마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56)
이 글의 맥락에서는 예수가 마나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비판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 통찰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맥락이다. 나는 민중들이 기독교를 힘(power)으로써 인식하였다는 것이 한국 개신교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질서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질서와 힘의 승인, 이것이 19세기 말에, 한국전쟁 이후에,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민중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가장 큰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좋든 나쁘던 그것이 한국 개신교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마나로 지녀진 예수’라는 언급에서 얻은 통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