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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278

채필근, 박형룡, 백낙준의 비교종교, 한국 종교 채필근의 책에 대한 느낌은 전에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책이라는 물질과 학문) 동시대를 살면서 반대되는 신학을 전개했던 채필근과 박형룡. 한쪽은 온건하고 다른 쪽은 우격다짐이다. 한쪽은 곤궁한 말년을 보냈고, 다른 쪽은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비교)종교학에 대한 이 둘의 차이 역시 선명하다. “참종교는 기독교”를 외치는 박형룡의 목소리는 현재 대다수 개신교인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채필근과 박형룡의 글은 종교학벌레2에 모아 두었다. 여기에 교회사가 백낙준에 대한 메모도 덧붙인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짧은 서술에 불과하지만, 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한국 고유전통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고 또 대표하는 글로서 중요하다. 백낙준의 글은 여기에 파일로 첨부한다. 신학자들 중에서 종교학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2009. 1. 13.
최병헌의 <만종일련> 최병헌의 과 은 개신교와 전통종교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나로서는 일독해야 할 글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글들은 읽기가 너무 어렵다. 한문이 중심이 된 국한문혼용체를 읽는 게 아직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단어들도 낯선 것들이 많다. 사실 아래 요약글은 시간이 없어 이진구 선생님의 논문, “한국 근대 개신교에 나타난 자타인식의 구조 -과 을 중심으로”를 읽고 정리한 것이다. 다음에는 내 힘으로 이 글을 소화하리라.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 불리는 최병헌은 일찍이 (1907)에서 전통 종교들과 기독교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유불선을 대변하는 인물들과 기독교를 대변하는 한 인물 사이의 대화 형식을 취한 이 저서는, 결국은 기독교 진리로 모아지는 성취론을 결론으로 한다. 대화.. 2009. 1. 13.
18세기 프랑스 선교사 사전에서 본 우리말 종교 어휘들 Stanislas Férron,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1869]). 1869년 페롱 신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불한사전에 ‘종교’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도(道)’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전을 뒤진 원래 목적은 우리말 ‘하느님’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자어인 ‘텬쥬’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암귀신, 몹쓸년, 마귀짓 등의 어휘에 더 눈길이 간다. les missionnaires de Coré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Yokohama: 1880). 페롱 신부가 불한사전을 제작할 때, 리델 신부는 을 편찬하였다. 이 사전은 1868년 경 완성되었으며, 1880년에 .. 2009. 1. 13.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사전에 나타난 신 명칭 초기 개신교 선교사 자료들에서 찾은 신 명칭 관련 자료들이다. 1. Underwood, Horace Grant 韓英字典 = 한영ㅈ뎐 :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in two parts : Korean-English & English-Korean / Horace Grant Underwood ; assisted by Homer B. Hulbert, James S. Gale. Yokohama : [s.n.], 1890. 언더우드가 1890년 편찬한 이 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이다. 아직 하느님이라는 번역이 정착하기 이전의 것이고, 게다가 언더우드는 처음에 하느님 사용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God’에 해당하는 말로 신, 상제, 하느님, 천주 네 가지.. 2009. 1. 13.
존 로스의 '하나님'의 발견 존 로스(John Ross)는 만주에서 최초의 우리말 성경 번역 작업을 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이다. 그는 만주에서 만난 서북 출신 한국인들과 더불어 한국말을 배우고 성서 번역을 진행하였다. 그가 최초로 성서 번역을 내놓은 것은 1882년의 이며 1887년에 드디어 최초의 우리말 완역 신약인 를 발간한다. (존 로스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로는, 이곳에서 김정현(Grayson)의 책을 볼 수 있으며, 그의 성서 번역 작업에 대해서는 성서 공회의 간단한 요약을 참조할 것.) 그가 성경을 번역하기 전에 저술한 간단한 한국어 교재를 찾아보았다. 1882년 상해에서 발행된 이다.(이것은 개정판의 연대이다. 초판이 언제 나왔는지는 확인해보아야 한다.) 책 마지막에 그는 간단하게 한국어 단어들을 정리해 놓았다.. 2009. 1. 13.
존 로스의 번역 초기의 낱권 성경들 존 로스가 최초 우리말 신약 번역인 (1887)를 내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882), (1882), (1883), (1883), (1884), (1884), (1885) 등을 낸 뒤에 1887년에 한데 묶어 신약 전체를 낸 것이다. 이번에 이전의 낱권 번역들을 간단하게 일람해 보았는데, 대충만 보아도 눈에 뜨이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었다. 1. 이것은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된 (1882년)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하느님’이다. 로스는 번역에 ‘하나님’을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고, 많이 보급된 에도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초의 번역에서는 ‘하느님’이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하나님이 단순한 표기의 문제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가 함경도인들과 작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2009. 1. 13.
존스의 종교 이해, 관련자료들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는 한국 종교에 대해서 가장 수준 높은 이해를 보인 선교사 중 하나이다. 그의 대표적인 글은 전에 소개한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 선교잡지에 실린 다른 글들을 찾아보았다. 그의 종교 이해가 어떻게 심화되었는지를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런 자료들을 찾아보게 된 것에는 이덕주 선생님의 논문, “존스의 한국 역사와 토착종교 이해”, 60(2007)가 긴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1. George Heber Jones, “The Religious Development of Korea,” Gospel in All Lands (Sep., 1891). 존스의 활동 초기의 글로, 종교에 대한 그의 원래 생각이 드러나는 글이다. 그는 한국의 종교전통을 .. 2009. 1. 12.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에 관련된 자료들 선교사 게일(James Scrarth Gale)에 대해 전에 조사해 둔 것이다. 최근에 게일에 대하여 정리할 일이 있어 옛날에 과제물로 작성해 두었던 파일을 다시 찾아 올린다. 이 글 중간 부분에 인용된 의 한국어 번역은 그대로 인용되어서는 안 될 자료인데, 미쳐 원문을 찾아보지 못해서 일단은 그대로 올려둔다. 게일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던 선교사"라고 단적으로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0년대에 "조선어풍에 맞는 성서"를 주장하면서 번역위원회에서 나와서 독자적인 번역을 출판했다는 대목은, 아직도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게일의 저술은 방대한데, 아래 정리된 내용은 그 중에서도 한국종교에 관련되어 찾아본 것이다. 1. 게일의 활동(1863-1937) 캐나다 온타.. 2009. 1. 12.
선교사 사진 자료를 제공하는 웹 페이지들 선교사들의 사진 자료를 볼 수 있는 웹페이지들을 모아보았다. 전세계의 선교 사진을 다룬 웹페이지 몇 개와 한국 선교 관련 사진을 다룬 웹페이지 몇 개. 1. 선교사 관련 자료들은 19세기 역사 자료를 정리한 페이지와 예일대 도서관 링크에서 좋은 사이트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2. 예일대에서 했던 전시회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선교엽서 전시가 눈길을 끈다. “Communications from the Field: Missionary Postcards from Africa” 이 내용은 워드 파일로 제공된다.(첨부파일) “Victorian Missionary Periodicals”라는 전시도 눈에 띈다. 3. 남가주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 2009. 1. 11.
존스, <한국인의 귀신 신앙>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 한국이름:趙元時)는 한국 개신교 초기인 1887년부터 활동한 감리교 목사이다. , , 등 중요한 잡지들의 창간 멤버이자 주요 필자로 활동하였다. 한국의 종교를 논한 여러 선교사들의 글 중에서도 그의 “한국의 귀신 신앙”이라는 글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spirit'은 정령으로 옮겨야 할 지 귀신으로 옮겨야 할 지 정하기가 힘들다. 보통 귀신으로 해석되는데, 가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그는 한국 종교를 다루는 데 있어서 범주 설정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고, 한국 종교에 대한 관찰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당시 선교사 중에서 높은 차원의 논의를 보여주며, 그래서 이후 다른 선교사들의 글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글 중간.. 2009. 1. 11.
기독신보 1937년 4,5월 사설들 이것으로 사설을 정리하는 작업이 끝났다. 내가 맡은 부분 중 마지막은 1937년 4,5월 분으로, 지난 번에 이어 당시 교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이다. 비판의 내용이야 다 맞는 말들이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대상도 지적하지 못하고 퍼부어대기만 하는 것은 단말마적인 독설로 읽힌다. 이 신문은 1937년 7월에 폐간되었다. 1937년 4월 21일 (제1115호) 분류: 사설 제목: 악한 누룩을 막자 오늘날 조선 교회에는 정책의 누룩, 수완의 누룩, 이용의 누룩 등 악한 누룩들이 많이 들어앉았다. 어떤 누룩은 교회 내에 무슨 부를 만들어 자기 기관 사업에 이용하고 선전하며 분규를 일으키고, 어떤 누룩은 자기 밥줄이 떨어질까 봐 갖은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다 쓰고 단말마적 행동을 하고 있다... 2009. 1. 11.
기독신보 1936년 1,2월 사설들 1935년 말의 의 사정에 대해서, 2권에는 ‘기독신보사건’이라는 명명 하에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165-168) 193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필순 목사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발행권을 둘러싸고 계파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교회들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얻어 경영 자립을 꾀했고 한국인 직원을 대거 채용하여 편집진을 보강했다. 이같은 ‘혁신적’ 조처는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예수교회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1935년 9월 조선예수교서회 이사회에서는 유억겸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전필순에게 사장직을 인계하도록 했으나, 전필순은 이를 거절하고 사무실을 종교 2가 서회 건물에서 수송동으로 옮기고 ‘재혁신’을 선언하며 독자.. 2009. 1. 11.
기독신보 1934년 6,7,월, 1935년 1,2월 사설들 자료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데(또 위험한데), 나는 이 시기 기독신보 사설들을 읽으면서 1930년대 한국 개신교의 지적인 쇠퇴를 느낀다. 당시 교계 여론을 이끄는 교계 지성인들의 사설에서 거의 창조적인 생각은 나타나지 않고 상투적인 논리와 언어의 반복을 통해서 지면만 잡아먹는 글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감각인데, 그 감각을 자료를 통해 ‘증명’하는 것은 까다롭다. 1920년대부터 한국 청년들의 두뇌는 개신교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른 집단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1930년대의 지적 쇠퇴는 사실 그 때 예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두뇌가 어디로 몰리는가’라는 것, 문화 현상의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2009. 1. 11.
기독신보 1933년 4,5,12월, 1934년 1월 사설들 이 시기 기사엔 그렇게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없었던 것 같다. 어려운 시기의 지지부진한 교회 상황이 보이고, 그 사이에서 비방의 표현이 간혹 눈에 뜨이는 정도. 대부분의 사설들은 장광설이나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기할 정도로 핵심이 빠져 있는 글들이다. 1933년 4월 5일 (제18권 제14호/제905호) 분류: 사설 제목: 新入生 諸君에게 이번 종교(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훈계할 것은 유물주의사상으로 흐르는 시대사상에 휩쓸리기 보다는 종교를 알기 위한 신중한 태도를 갖고 예수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기독교를 알아보았으면 한다. 1933년 4월 5일 (제18권 제14호/제905호) 제목: 宗敎敎育初步로 宗敎講座를 組織 -從來學科偏重을 打破 시대가 종교적 교육을 요구하는 바, 이번 경기도 학무.. 2009. 1. 11.
기독신보 1932년 12월 사설들 1932년 12월 한달치인데, 이 달에는 의 특종이 있다. 12월 14일 “이세벨의 무리를 삼가라”는 사설이 그것. 이 사설은 이용도 목사와 (그와 관련되었다고 주장된) 신앙 공동체들에 대한 최강의 단죄이다. 여러 사람들이 언급되지만 가장 거물이자 주 타겟은 이용도 목사이다. 이 이용도 때리기는 이용도 목사의 잘못을 직접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도와 관련된 한준명, 그리고 여선지자(유명화)에 대한 비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열한 방식이다. “이세벨의 무리”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표현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이세벨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계기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논쟁 자체가 이후 교회사를 장식하는 이단 논쟁의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 2009.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