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966 트롤로프의 한국 불교 이해 우리나라 성공회 주교를 역임했던 트롤로프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선교사였다. 그의 다음 글은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글이지만 이해의 깊이는 충분히 느껴진다. 1914년 글으로, 그전의 한국 불교에 대한 서양인의 논의에 비하면 한국 불교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학문적인 글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클락(Clark)이 평가했듯이(, 12), 한동안 중요한 학문적 기여를 한 글로 남아있게 된다. M. N. Trollope,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Buddhism in Corea," 8 (1917): 1-40. (첨부 파일: Trollope_Intoro_to_Buddhism_.pdf) 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서양인의 이해의 잘못을 잡아주는 글의 도입부나, 삼귀.. 2009. 1. 20. 한국 교회의 성서 해석의 흐름(1930년대) 이 글은 유동식의 [한국신학의 광맥](다산글방, 2000)의 일부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한국의 성서 해석의 흐름이 신학사와 어떻게 맞물리며 전개되었는지를, 유동식 선생은 대가답게 시원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 발표문은 그 책의 내용을 세 명의 인물과 여섯 개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라고 명명된 흐름이 (분량으로 인해) 동등한 세력을 지닌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산술적 균형이 아니라 (아마 유선생님이 바랬을) 기하학적 배분일 뿐이다. 물론 한국의 신학 현실은 압도적으로 보수적이며, 그렇게 보수적으로 되는 과정은 밑에 나열해 놓은 사건들의 경과에서 잘 나타난다. 1930년대는 한국 개신교회가 급격히 보수화된 시점.. 2009. 1. 13. 한문 성서 번역 때 신 명칭 논쟁에 관한 자료 개신교 선교사들은 성서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 “God”을 무엇으로 옮길지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1847년 상하이에서 선교사 메드허스트의 집에서 모인 중국어 성서 개정 대표위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기에는 선교사 출신 학자 레게(James Legge)도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 대해서는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 하겠으나 일단은 리진호 선생님의 책에서 읽은 것을 옮겨놓도록 하겠다. 먼저 침례회 선교사들은 회의 이전부터 “밥티즘”을 원어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채용이 안되자 위원회를 탈퇴한 것이다. 다음에 God의 번역에 있어 처음부터 다른 의견이 속출하여 위원회가 둘로 분리되었다. 모리슨은 “神”이라고 번역하였고 귀츨라프와 메드허스트도 처음에는 그렇게 사용하였다. 중국에 온 다른 선교사들도.. 2009. 1. 13. 채필근, 박형룡, 백낙준의 비교종교, 한국 종교 채필근의 책에 대한 느낌은 전에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책이라는 물질과 학문) 동시대를 살면서 반대되는 신학을 전개했던 채필근과 박형룡. 한쪽은 온건하고 다른 쪽은 우격다짐이다. 한쪽은 곤궁한 말년을 보냈고, 다른 쪽은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비교)종교학에 대한 이 둘의 차이 역시 선명하다. “참종교는 기독교”를 외치는 박형룡의 목소리는 현재 대다수 개신교인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채필근과 박형룡의 글은 종교학벌레2에 모아 두었다. 여기에 교회사가 백낙준에 대한 메모도 덧붙인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짧은 서술에 불과하지만, 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한국 고유전통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고 또 대표하는 글로서 중요하다. 백낙준의 글은 여기에 파일로 첨부한다. 신학자들 중에서 종교학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2009. 1. 13. 최병헌의 <만종일련> 최병헌의 과 은 개신교와 전통종교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나로서는 일독해야 할 글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글들은 읽기가 너무 어렵다. 한문이 중심이 된 국한문혼용체를 읽는 게 아직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단어들도 낯선 것들이 많다. 사실 아래 요약글은 시간이 없어 이진구 선생님의 논문, “한국 근대 개신교에 나타난 자타인식의 구조 -과 을 중심으로”를 읽고 정리한 것이다. 다음에는 내 힘으로 이 글을 소화하리라.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 불리는 최병헌은 일찍이 (1907)에서 전통 종교들과 기독교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유불선을 대변하는 인물들과 기독교를 대변하는 한 인물 사이의 대화 형식을 취한 이 저서는, 결국은 기독교 진리로 모아지는 성취론을 결론으로 한다. 대화.. 2009. 1. 13. 18세기 프랑스 선교사 사전에서 본 우리말 종교 어휘들 Stanislas Férron,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1869]). 1869년 페롱 신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불한사전에 ‘종교’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도(道)’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전을 뒤진 원래 목적은 우리말 ‘하느님’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자어인 ‘텬쥬’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암귀신, 몹쓸년, 마귀짓 등의 어휘에 더 눈길이 간다. les missionnaires de Coré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Yokohama: 1880). 페롱 신부가 불한사전을 제작할 때, 리델 신부는 을 편찬하였다. 이 사전은 1868년 경 완성되었으며, 1880년에 .. 2009. 1. 13.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사전에 나타난 신 명칭 초기 개신교 선교사 자료들에서 찾은 신 명칭 관련 자료들이다. 1. Underwood, Horace Grant 韓英字典 = 한영ㅈ뎐 :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in two parts : Korean-English & English-Korean / Horace Grant Underwood ; assisted by Homer B. Hulbert, James S. Gale. Yokohama : [s.n.], 1890. 언더우드가 1890년 편찬한 이 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이다. 아직 하느님이라는 번역이 정착하기 이전의 것이고, 게다가 언더우드는 처음에 하느님 사용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God’에 해당하는 말로 신, 상제, 하느님, 천주 네 가지.. 2009. 1. 13. 존 로스의 '하나님'의 발견 존 로스(John Ross)는 만주에서 최초의 우리말 성경 번역 작업을 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이다. 그는 만주에서 만난 서북 출신 한국인들과 더불어 한국말을 배우고 성서 번역을 진행하였다. 그가 최초로 성서 번역을 내놓은 것은 1882년의 이며 1887년에 드디어 최초의 우리말 완역 신약인 를 발간한다. (존 로스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로는, 이곳에서 김정현(Grayson)의 책을 볼 수 있으며, 그의 성서 번역 작업에 대해서는 성서 공회의 간단한 요약을 참조할 것.) 그가 성경을 번역하기 전에 저술한 간단한 한국어 교재를 찾아보았다. 1882년 상해에서 발행된 이다.(이것은 개정판의 연대이다. 초판이 언제 나왔는지는 확인해보아야 한다.) 책 마지막에 그는 간단하게 한국어 단어들을 정리해 놓았다.. 2009. 1. 13. 존 로스의 번역 초기의 낱권 성경들 존 로스가 최초 우리말 신약 번역인 (1887)를 내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882), (1882), (1883), (1883), (1884), (1884), (1885) 등을 낸 뒤에 1887년에 한데 묶어 신약 전체를 낸 것이다. 이번에 이전의 낱권 번역들을 간단하게 일람해 보았는데, 대충만 보아도 눈에 뜨이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었다. 1. 이것은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된 (1882년)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하느님’이다. 로스는 번역에 ‘하나님’을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고, 많이 보급된 에도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초의 번역에서는 ‘하느님’이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하나님이 단순한 표기의 문제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가 함경도인들과 작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2009. 1. 13. 한국 개신교사 자료들에서 여성에 대한 언급들 이숙진의 (한들출판사, 2006)을 읽다가 재미있었던 자료들을 메모해 둔다. 1. 교회에 다니면서도 신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죄로 고백한 부인.(요즘에도 은근히 이런 죄책감 가진 교인들이 많다. 나는 왜 방언이 안 터지는가...라는 식의) 공부하는 부인 중에 죄를 감히 깨닫고 자목하매, 믿음이 부족하여 항상 교회에는 다니나 재미를 얻지 못하고 신령한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여 ( 1911년 12월 30일) 2. 창세기를 가부장적 시선으로 해석한 예. 나는 창세기에 대한 두 해석을 다루기는 했지만, 그 글에서 보수적인 해석이 주류 해석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았다. 그러한 것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다음 예가 전형적인 것이 되리라. 우리 여인의 죄를 생각하면 남자부텀 더 만흐니 .. 2009. 1. 13. 한국의 추수감사절 수용 방원일, (문학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대학원, 2001), p.33-34. 추수감사절은 선교 과정에서 엘리트 전통에 의해서 부과되었다는 특성이 두드러진 절기 의례이며, 이 점에서 대중 전통에 의해 수용이 주도된 크리스마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초기 추수감사절의 실천 양상은 이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추수감사절은 선교 개시 직후부터 수행된 의례가 아니며 한국의 교단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된 시점에서 실행되기 시작한 절기 의례이다. 1900년만 해도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추수감사절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 1902년에 들어서야 이천의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예배를 올렸다는 기록이 등장한다.2) 이후 각 교단마다 달리 지켜지던 추수감사절은 1904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통일적으로 지켜지기로 결의된.. 2009. 1. 13. 존스의 종교 이해, 관련자료들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는 한국 종교에 대해서 가장 수준 높은 이해를 보인 선교사 중 하나이다. 그의 대표적인 글은 전에 소개한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 선교잡지에 실린 다른 글들을 찾아보았다. 그의 종교 이해가 어떻게 심화되었는지를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런 자료들을 찾아보게 된 것에는 이덕주 선생님의 논문, “존스의 한국 역사와 토착종교 이해”, 60(2007)가 긴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1. George Heber Jones, “The Religious Development of Korea,” Gospel in All Lands (Sep., 1891). 존스의 활동 초기의 글로, 종교에 대한 그의 원래 생각이 드러나는 글이다. 그는 한국의 종교전통을 .. 2009. 1. 12.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에 관련된 자료들 선교사 게일(James Scrarth Gale)에 대해 전에 조사해 둔 것이다. 최근에 게일에 대하여 정리할 일이 있어 옛날에 과제물로 작성해 두었던 파일을 다시 찾아 올린다. 이 글 중간 부분에 인용된 의 한국어 번역은 그대로 인용되어서는 안 될 자료인데, 미쳐 원문을 찾아보지 못해서 일단은 그대로 올려둔다. 게일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던 선교사"라고 단적으로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0년대에 "조선어풍에 맞는 성서"를 주장하면서 번역위원회에서 나와서 독자적인 번역을 출판했다는 대목은, 아직도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게일의 저술은 방대한데, 아래 정리된 내용은 그 중에서도 한국종교에 관련되어 찾아본 것이다. 1. 게일의 활동(1863-1937) 캐나다 온타.. 2009. 1. 12. [전단지] 건강 전도 눈을 확 잡아끄는 시도이다. 그런데 지압을 통한 건강 증진과 예수를 통한 구원을 어떻게 연관시킬지 쉽게 잡히지는 않는다. “행복과 건강의 길”이라는 제목만이 뭔가 관련이 있을만한 낌새를 암시해 줄 뿐이다. 둘 중 하나이다. 동양 의학의 세계와 기독교를 연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을 마련해 놓았든지, 아니면 지하철 노선표를 싣는 것처럼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단지이든지. (전단 가운데 부분을 보면 “건장전도는 저작권 보호를 받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취향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기획에 의해 제작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2009. 1. 12. [사진] 교회 명패 귀국하기 며칠 전 서울 시내를 쏘다니다가 우연히 광화문 근처에 있는 새문안 교회에 들어갔다.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다. 자신의 역사성을 잘 인식하고 있어서인지 교회 지하에 아담한 교회 박물관을 갖고 있었다. 느낌이 좋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가정집마다 붙어 있는 교회 명패가 한국 특유의 현상이라는 마음의 정원님 말씀이 생각나서, 전시물 중에서 교회 명패를 찍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1960년대의 것인데, 최초의 명패라고 해 놓은 것을 보면 그 때 교회 명패들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 교회의 급성장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정확히 언제 어느 교회에서 어떤 연유에서 이 명패를 만들었는지는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 (천주교회들도 이런 종류의 명패가 있다. 이것이 개신교회에서 .. 2009. 1. 12. 이전 1 ··· 55 56 57 58 59 60 61 ··· 6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