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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교리

한국 교회의 성서 해석의 흐름(1930년대)

by 방가房家 2009. 1. 13.

이 글은 유동식의 [한국신학의 광맥](다산글방, 2000)의 일부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한국의 성서 해석의 흐름이 신학사와 어떻게 맞물리며 전개되었는지를, 유동식 선생은 대가답게 시원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 발표문은 그 책의 내용을 세 명의 인물과 여섯 개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라고 명명된 흐름이 (분량으로 인해) 동등한 세력을 지닌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산술적 균형이 아니라 (아마 유선생님이 바랬을) 기하학적 배분일 뿐이다. 물론 한국의 신학 현실은 압도적으로 보수적이며, 그렇게 보수적으로 되는 과정은 밑에 나열해 놓은 사건들의 경과에서 잘 나타난다. 1930년대는 한국 개신교회가 급격히 보수화된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회가 시작된 지 50년 정도가 되는 1930년대, 20년대 문화정치 시절에 유학 나갔던 신학생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한국 교회 내에서는 신학적 논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한국인들에 의한 신학 논문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한국 교회는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지니기 시작한다. 장로교회의 주류는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의 정통을 확고히 하기 시작하였고, 그 안에 잔존해 있던 진보적 신학의 흐름은 해방 후 기장으로 독립해 나오게 된다. 한편 감리교회는 자유주의적이고 다원적인 신학 전통의 기초를 마련한다.



인물 #1: 박형룡
한국 교회가 보수화되는 과정에 박형룡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서 전부가 하느님의 감동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서의 저자는 성령이며 기자는 기계적인 매체에 불과하다. 하느님이 직접 적으신 성서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그 안의 역사적 과학적 사실까지도 완전한 것이다. 그것은 기계적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이며 근본주의의 기초가 된다. 성서의 고등적 비평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을 불신하고 성서를 파괴하는 연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의 교리중심적 성서 이해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 사상의 기본을 이루며, 한국에서 성서의 권위를 확립한 측면이 있다.

인물 #2: 김재준
그는 성서의 기록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주체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 졌으며, 따라서 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자의식을 잃은 인간의 무당적 작업을 전제하는 것이며 과학적 무오설은 현대 학문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의 저자들은 고대 세계관이라는 환경에서 작업하였기 때문에, 그 문화적 배경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라 보았다. 신학자는 고대 문화적 요소와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산 말씀을 구별해야 하며, 이것이 문학적, 역사적 연구 곧 고등비판학의 임무이다.
김재준은 특히 사회-역사적 배경 연구를 중시하였는데. 1933년에 『신학지남』에 발표한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이라는 논문이 그의 학문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기 직전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분석하여 당시가 정치적으로 부정부패하고 종교가 타락한 시대임을 소상히 밝힌다. 그러한 당시 상황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오늘의 사회적 상황에 성서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제하 당시를 ‘불의에 가득한 시대’라고 지칭하면서 예언자적 용기를 요청한다.
그러한 성서 이해로 인해 그는 결국 해방 이후 면직 처분을 받고, 기독교 장로회라는 새로운 교파로 독립해야만 했다. 그의 진보적 성서 이해는 1970년대 민중신학에 의해 계승된다.

인물 #3: 정경옥
정경옥은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찾을 것을 강조하였고(즉 과학적 지식이나 역사적 지식을 찾지 않으며), 성서를 하느님의 은혜를 알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즉 성서 밖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서는 인간의 책이요, 종교 문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연구를 통해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학지남』에 연재한 요한 서신 강해를 통해 성서의 저자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읽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존적 이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39년에 『기독교신학개론』을 저술해 서구의 진보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신학의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의 입장은 감리교 신학의 전통을 이룬다. 감리교는 성서 이해에 교리적 제재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 비평을 비교적 자유롭게 소개하였다. 실존적 사랑을 주장한 요한서신은 감리교 신앙운동의 기본 본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대부흥회의 기본 텍스트였으며, 이용도가 애용한 경전이기도 했다) 일반 계시를 찾는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후배 신학자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장면 #1: 내한 선교사들의 성서 이해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들은 성서의 문자 그대로를 한국인들에게 전달하겠다는 하는 사명감으로 선교에 임하였으며, 그것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퓨리탄적인 신앙이라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신학교수 생활을 했던 이눌서(李訥瑞, W. D. Reynold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종교와 경전과의 관계는 절대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심히 보수적인 것으로 비난될런지 모르나 그러나 나는 나의 신념을 버릴 수는 없다...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성경을 믿지 아니하면 그때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경전이 변하면 종교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나 절구(絶句)를 고친다든지 그 정신을 덮어 놓는다든지 그 의미를 굽힌다든지 해서는 아니된다.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정신을 그대로 발휘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장면 #2: 초기 한국 교회의 보수적 분위기
“1926년 함흥에서 개최한 성격학교 보습과생을 위한 사경회 때 카나다 선교사 서고도 목사는 성서비평학을 용납한 성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청강생 중 한 사람인 한기춘 전도사와의 논쟁이 있었다... 서목사는 성경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을 밝혔다. 이 비평적인 해석에 장탄식을 한 사람도 있었고, 이러한 위험한 이단자들과는 함께 교회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일본으로 가는 사람(장도원 목사), 그리스도교회로(이원규 목사), 동아기독교로(한기준 목사) 교적을 옮긴 일까지 있었다.”

장면 #3: 1933년 장로교 회칙 개정
“신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믿고 행할 본분의 확실한 법례인데 다만 이밖에 없나니라”(1907년 총회록) →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예수교 장로회 12신조) 이 개정은 근본주의적인 성서 해석이 한국 교회를 장악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사건 #4: 창세기 모세 저작 문제
1934년, 한국 교회역사 최초로 성서 해석에 대한 견해가 문제가 되어 총회 석상에 제소되었다. 김영주 목사가 창세기의 저자를 모세라고 할 수 없다는 내용을 주일학교 교재에 수록한 것이 문제가 됨. 장로교 총회에서는, 구약 첫 다섯권은 항상 오경으로 묶여 불렸으며 창세기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것은 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것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무시라는 결론을 내리고 김목사에 대한 면직 처분을 내렸다.

사건 5#: 여성의 권리 문제
김춘배 목사의 글 중,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하고 한 것은 이천년 전의 일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하였다는 이유로 제소되었다. 사건 4,5에서 박형룡이 중심이 된 연구위원회가 자유주의적인 해석을 억압하는데 활약한다.

사건 6#: 아빙돈 주석
아빙돈 주석은 1930년에 나온 최신 주석으로 류형기,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이 번역하였다. 그 주석에는 당시의 성서비평학, 예를 들어 벨하우젠의 문서 비평, 궁켈의 구전, 올브라이트의 성서고고학, 전승사, 역사 신학들이 망라된 주석이었다. 35년 장로교 총회에서는 길선주와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 주석이 신앙에 위협이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장로교에서는 일체 그 책을 구입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한 신학저들은 시말서와 사과 성명을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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