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필근의 책에 대한 느낌은 전에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책이라는 물질과 학문) 동시대를 살면서 반대되는 신학을 전개했던 채필근과 박형룡. 한쪽은 온건하고 다른 쪽은 우격다짐이다. 한쪽은 곤궁한 말년을 보냈고, 다른 쪽은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비교)종교학에 대한 이 둘의 차이 역시 선명하다. “참종교는 기독교”를 외치는 박형룡의 목소리는 현재 대다수 개신교인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채필근과 박형룡의 글은 종교학벌레2에 모아 두었다.
여기에 교회사가 백낙준에 대한 메모도 덧붙인다. <<한국개신교사>> 앞부분에 등장하는 짧은 서술에 불과하지만, 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한국 고유전통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고 또 대표하는 글로서 중요하다. 백낙준의 글은 여기에 파일로 첨부한다.
신학자들 중에서 종교학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이가 채필근이라고 생각된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해방 후에 곤궁한 사정이라 종교학 공부를 발전시킬 수 없었지만, 그가 동경제대에서 배운 수준만으로도 종교학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는 “종교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science of Religion?)”(<<신학지남>> 71호(1933년 9월): 9-13)에서 “종교학은 종교를 대상으로 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한 가지 학문”이라는 평범한 정의로 소개를 시작한다. 그는 종교학을 세 분야로 나눈다. (1)특수종교의 연구(종교사/신학), (2)비교종교학, (3)종교의 일반적 연구(종교철학/종교현상학/종교사회학/종교심리학)가 그것이다. 특히 “비교종교학은 모든 종교에 관한 사실을 채집하고 분석하며 배열하여 그 이동(異同)을 비교하며 그 종류를 분합(分合)하는 것이다.” 대부분 원론적인 소개이지만, 끝부분에서는 종교학의 추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덧붙이고 있다. “과거의 종교학은 발생 과정에 있으니만치 원시적 종교를 연구의 자료로 더 많이 쓴 듯하나, 현금(現今)의 종교학 내지 미래의 종교학은 고등종교를 관점의 초점에 둘 것과 같다.”
채필근은 온건한 태도로 객관적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을 소개하고 있어 신학적인 경향은 그리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종교신앙과 종교연구”(<<신학지남>> 49호(1930년 1월): 7-13)에서도 종교 연구에 있어 신앙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장단점을 고루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은 종교와 신앙의 상호 상승을 강조함으로써, 미묘하게나마 자신의 위치를 옹호하는 것을 글의 결론으로 한다. “종교를 깊이 연구하여 완전한 이해를 하는 이가 보통으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종교를 열심으로 신앙하여 경건한 행위를 하는 이가 흔히 종교 연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해방 후의 글인 “한국교회에 미친 유교사상”(<<기독교사상>> 44호(1961년 6월): 10-17)에서 채필근은 한국 기독교 내의 유교적 영향들을 지적한다. 그것은 신에 대한 인격성이 부족함, 자연주의 사상이 강함, 노력과 창조성이 부족, 윤리 방면을 지나치게 고조(高彫)함 등이다. 권위주의와 같은 유교에 대한 편견에 근거한 지적이 아니라, 사상적 입장에서 한국 교회의 신학적 특성을 지적하는 작업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채필근은 자신이 종교학 전공자는 아니라는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 1933년 글(종교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극히 상식적으로 종교학이란 것은 어떠한 것이라고 조금 말하고자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해방 후 경남 지역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했으며, 이를 정리해 1960년에 <<비교종교론>>을 낸다. 특이하게 이 책의 서문은 ‘사과의 말씀’이라는 제목이다. 그것은 우선 기독교 변증론의 입장에 서있음에 대한 사과이고, 다음은 학술 자료의 부족이다. “처음 쓰려고 할 때에는 책 이름을 “종교학 개론”이나 “비교종교학”이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쓰기를 시작하고 보니 우선 참고서적을 얻을 수가 없고 또 기억력이 작년 때보다 쇠퇴해져서 학자들의 이름이나 연대나 그 학설의 내용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책 이름을 종교학이라고는 붙일 수 없는 줄로 깨닫고 “비교종교론”이라고 일컫기로 합니다.”
채필근은 온건한 태도로 객관적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을 소개하고 있어 신학적인 경향은 그리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종교신앙과 종교연구”(<<신학지남>> 49호(1930년 1월): 7-13)에서도 종교 연구에 있어 신앙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장단점을 고루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은 종교와 신앙의 상호 상승을 강조함으로써, 미묘하게나마 자신의 위치를 옹호하는 것을 글의 결론으로 한다. “종교를 깊이 연구하여 완전한 이해를 하는 이가 보통으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종교를 열심으로 신앙하여 경건한 행위를 하는 이가 흔히 종교 연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해방 후의 글인 “한국교회에 미친 유교사상”(<<기독교사상>> 44호(1961년 6월): 10-17)에서 채필근은 한국 기독교 내의 유교적 영향들을 지적한다. 그것은 신에 대한 인격성이 부족함, 자연주의 사상이 강함, 노력과 창조성이 부족, 윤리 방면을 지나치게 고조(高彫)함 등이다. 권위주의와 같은 유교에 대한 편견에 근거한 지적이 아니라, 사상적 입장에서 한국 교회의 신학적 특성을 지적하는 작업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채필근은 자신이 종교학 전공자는 아니라는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 1933년 글(종교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극히 상식적으로 종교학이란 것은 어떠한 것이라고 조금 말하고자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해방 후 경남 지역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했으며, 이를 정리해 1960년에 <<비교종교론>>을 낸다. 특이하게 이 책의 서문은 ‘사과의 말씀’이라는 제목이다. 그것은 우선 기독교 변증론의 입장에 서있음에 대한 사과이고, 다음은 학술 자료의 부족이다. “처음 쓰려고 할 때에는 책 이름을 “종교학 개론”이나 “비교종교학”이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쓰기를 시작하고 보니 우선 참고서적을 얻을 수가 없고 또 기억력이 작년 때보다 쇠퇴해져서 학자들의 이름이나 연대나 그 학설의 내용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책 이름을 종교학이라고는 붙일 수 없는 줄로 깨닫고 “비교종교론”이라고 일컫기로 합니다.”
채필근의 온건한 태도에 반해, 대표적인 근본주의 신학자인 박형룡은 호교론적인 태도에서 비교종교학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천명한다. 그는 1937-8년에 <<신학지남>>에 연재된 “종교론”에서 종교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교종교학이 최근에 와서 더욱 철저히 과학화하여 …… 그 명칭으로부터 ‘비교’ 두 자를 삭제한 것이니, 신앙의 대상인 신, 영생 같은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간여하지 않는다. 즉 연구하는 바는 종교의 형태요 종교 그 자체가 아니며 한 종교와 다른 종교와의 우열을 보이는 것도 목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보수신학적 입장에서 내린 종교학에 대한 명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후에 박형룡 전집에 포함된 <<비교종교학>>(1978)은 늦게 출판되기는 했지만 내용은 “40여 년 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세계 여러 종교들의 역사에 비교를 겸한 교안을 <세계 종교사>라는 표제 아래 작성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종교학’은 다루어지지 않으며 오직 ‘비교종교학’만이 다루어진다. 비교의 목표는 분명하다. “종교의 비교에 있어서 여러 종교들 사이의 상호비교가 자연한 과정이지만 결국 기독교와의 비교가 가장 중요하며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의 독특함을 변증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23)
그는 종교진화론에 대한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이른바 원시종교와 고등종교의 연속성이 불경한 발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개인의 여러 가지 숭배형태는 미신의 발작 뿐인가? 참 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의의를 가졌는가? 혹자들은 미개인의 종교 생활에 종교 진화의 출발점을 발견하려 하나 그것은 과도한 억측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의 심령은 본능적으로 종교를 요구하여 마지않는다는 사실의 증거로는 상당한 것이다.”(58) 그러므로 “미개종교와 참 종교 사이에 진화적 연결을 추정함이 무리함은 양자의 의미를 비교하여 볼 때에 판연히 드러나는 것이다.”(59) 그가 옹호하는 것은 원시유일신론과 같은 ‘종교퇴화론’이다. “우리가 참 종교(기독교)의 입장엣 볼 때에 종교는 역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원하였고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여러 모양의 열등 종교들이 생긴 것이다. 원시 시대에도 열등 종교와 참된 고등 종교가 동시에 존재한 현상은 이 종교 퇴화론을 지원한다.”(39-40)
그의 비교 작업의 결론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의 실패이다. ‘모든 그릇된 종교들의 치명적 결함’이라는 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우연적 진리들에도 불구하고 치명적 결함들을 갖고 있다.…… 모든 민족들이 혹은 더 혹은 적게 명료한 신격의 개념을 가진 것이 참이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들에게 버려두면 그들은 공자(孔子) 모양으로 성운(星雲) 같이 흐린 사물의 고찰에 피로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등한해지거나, 힌두교도 같이 희미하게 약도(略圖)된 신적 임재를 확대하고 희박하게 하여 그것이 생명이나 인격 없는 모든 것에 널리 퍼지는 무엇이나 공무(空無)가 되게 하기까지 이르거나,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남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벌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 이리하여 이교도는 그들이 자신들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아니했다.”(380) 이 책은 ‘참 종교는 기독교’라는 절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모든 종교들 중에 기독교만이 신적 기원을 가지어서 반드시 다른 종교들을 대신하여 세계를 점령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387)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앞부분에 등장하는 한국의 종교적 배경 서술은 짧지만, 기독교 선교사 서술을 위한 준비로서 변형된 종교 서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서술의 특징은 한국의 ‘종교 없음’ 진술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혼합현상이라는, 하르낙으로부터 받아들인 새로운 개념을 통해서 한국 종교지형을 선교에 알맞게 규정해버린 점에 있다. 백낙준은 샤머니즘을 정령숭배와 동일시하여 서술한 뒤 우리 민족에게 미신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고 평가하며, 불교와 유교에 대해 간단히 역사적으로 개괄한다. 그는 세 전통이 민중 전통에서 종교혼합으로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판적인 쪽으로 “종교혼합행위는 우리 겨레가 진리의 확증을 찾아보려는 비판성과 신앙적 집착성을 결여함을 보여주는 예증이 될 것 같다”(20)고 판단할 수 있는 반면에, “표면적으로 볼 때에 한국인의 종교혼합은 신앙에 무관심 내지 무한한 관용성의 표현 같으나, 엄정히 따져보면 종교신앙의 기갈(飢渴)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21)는, 선교적인 입장에서의 장점도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겨레의 종교혼합현상을 고찰할 때에 새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종교가 그 특성에 의하여 제공하고 있는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하나의 세계적 종교를 요청하는 그것이다. 유교가 가진 높은 윤리적 표준과 불교가 지닌 창생제도(蒼生濟度)의 자비와 샤마니즘에서 볼 수 있는 생사의 신비성과 영계 관념을 구비한 종교를 갈구하는 현상이다.”(20-21) 백낙준의 한국 종교 서술은 선교초기의 종교 없음 담론을 혼합현상으로 개념화하여 영속시키고, 이를 통해 한국종교 서술을 기독교 선교의 필연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최적화시킨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