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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문헌

한국 개신교사 자료들에서 여성에 대한 언급들

by 방가房家 2009. 1. 13.
이숙진의 <<한국기독교와 여성 정체성>>(한들출판사, 2006)을 읽다가 재미있었던 자료들을 메모해 둔다.

1. 교회에 다니면서도 신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죄로 고백한 부인.(요즘에도 은근히 이런 죄책감 가진 교인들이 많다. 나는 왜 방언이 안 터지는가...라는 식의)
공부하는 부인 중에 죄를 감히 깨닫고 자목하매, 믿음이 부족하여 항상 교회에는 다니나 재미를 얻지 못하고 신령한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여 (<<그리스도인 회보>> 1911년 12월 30일)

2. 창세기를 가부장적 시선으로 해석한 예. 나는 창세기에 대한 두 해석을 다루기는 했지만, 그 글에서 보수적인 해석이 주류 해석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았다. 그러한 것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다음 예가 전형적인 것이 되리라.
우리 여인의 죄를 생각하면 남자부텀 더 만흐니 하느님께 정성을 더 하여야 할지라. 왜 그러한고 하니, 태초에 아담이 먼저 하느님께 범죄한 것이 아니오, 해와가 먼저 죄를 범한 것이라. 전에부터 오늘까지 마귀를 숭본하여 국하기와 불공이며 미력과 산천으로 좇아다니며 여러 귀신들을 섬기는 것이 다 부인의 좋아하는 바니, 어찌 아니 남자부터 여자가 더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뇨. (<<그리스도인회보>> 1905년 7월 18일)

다음 자료도 그러하다.
사람을 創造하실 때부터 先後가 有하고 職分이 異하다. 아담은 主掌者요, 하와는 補助者이다. 犯罪 후에는 더욱 진분이 판이하였다. 남자는 사업이요 여자는 생산이다.
(채정민, “正統의 敎會도 俗染은 可畏- 女子에개 言權없다,” <<기독신보>> 1934년 8월 22일.)


3. 개신교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외인’이라고 호칭하면서, 성도/외인의 이분법을 통하여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명직의 다음 글은 이분법의 경계를 흥미로운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종로구 출신 메타포를 통한 교회 공간의 성화가 두드러진다.
열어놓은 파고다 공원 같은 동산이 아니요, 하느님께 속한 비원이라. 개방한 동산은 만인이 다 들어갈 수 있지만 비원에는 잡사람은 금하나니라... 우리의 마음은 화조월석에 李郞을 보내고 金郞을 맞는 창기의 더러운 마음이 아니요, 동산에 담이 있어서 안과 밖의 구별됨으로 도시의 세속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함과 같이 우리 마음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요, 세상과는 관계가 없나니, 이것이 비원, 곧 잠근 동산이다.
(이명직, “비원,” <<활천>> 26호 (동양선교회 출판부, 1925).


4. ‘여성=미신’ 담론의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 노릇 못하고 집안 꼴이 안되고 나라가 결단나는 이 미신을 없애야 한다... 미신 가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미신은 여자에게 더 만타. 그 까닭은 여자가 남자보다 감정이 더 만흔 것이 하나요 무식자의 수가 여자에게 더 만흔 것이 또한 이유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소위 공부 하였다는 여성들이 이 미신행위를 하는 일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여성 전체에 모욕이오, 따라서 여자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썽쟁이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만규, “미신과 신여성,” <<신여성>> 1933년 12월)

5. 여성에 대한 철저한 배제 논리. 여자가 많아서 탈이라는 1930년대의 걱정.
여자 교인이 많게 된 결과에 (1)여자들이 優勝하야 교회는 여자만이 다니는 곳이라고 世人은 인정하게 되고 (2)교역자의 설교는 여자들을 중심하게 되어 설교 내용이 더욱 유치하게 되고 世人의 嘲笑거리가 됨 (3)무식한 여자의 신비적이요 寫實的 태도의 誤謬된 표현으로 因하야 교회는 미신화되기 쉽게 된 것이다
(한치진, <<기독교 인생관>> (조선철학출판사, 1934), 200.)


6. 이 전도부인의 겸양은 자기비하로 느껴질 정도로 기가 막힌다. 그것이 교회에서 묵묵히 일한 여성의 처지였으리라.
어렷을 때부터 신앙의 생활을 하게 되어 이십년 동안 여전도인의 책임을 하였습니다. 여전도인의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걸네”라구요... 알는 집에서 긔도하고 초상나면은 렴장이 노릇하고 순산하는 분에는 조산부 산파되고 경성을 포위하여 삼사십리 식 나가서 촌교회가서 가정학이란 과정, 아해 기르는 것, 성경, 국문 등을 가르치고 혼인집 장사집 락심한 집 두로 단이는 책임이 걸네와 갓슴이다. 그런니 걸네 업는 집안은 깨끗지 못합니다.
(정마리아, “여전도인의 불평과 희망: 최후 승리까지,” <<기독신보>> 1930년 1월 1일)


7. 교회 분위기를 논함에 정녀/음녀의 논법이 끼어드는 일, 지금의 교회 현장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머리에 향유나 바르고 얼굴을 들고 눈을 휘두르고 다니는 그 사람의 속에 정결한 것이 조금도 없다. 기생, 갈보는 청춘소년 남자를 유혹하느라고 향유를 바르고 분으로 면판에 바르고 비단옷을 입지만 만일에 신성한 숙녀면 누구를 위하여 꾸미는가?... 얼굴에 분칠을 하고 거들먹대고 다니는 여자는 아무리 보아도 그리스도의 신부스럽지 않다. 이것이 이세벨의 딸이다. 그리스도는 분바르고 향내나는 얼굴을 부끄럽게 여기시고 마음이 거룩한 자를 찾의신다. 얼굴의 분은 영혼이 썩아진 증거요 향기는 영혼이 썩어지는 냄새이다. 이것은 곧 회칠한 무덤이다.
(ㅁㅈ 生, “二種의 女人,” <<활천>> 20호(1924년 7월), 43-44.)


8. 혼인 약속을 한 남자가 죽자 같이 자결하려 한 여인을 찬양한다.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고스란히 들어와 있음을 볼 수 있다.
거룩하다 리부인이여, 결심은 엇지 그와 갓치 용감하며 쳐사난 엇지 그와 각치 쥬밀하며 자결은 엇지 그와 각치 죠용하엿난고. 다시 말하면 이것이 진경의 련애요, 이것이 진졍 정사이다.
金瑗根, “李氏의 貞節과 그의 經紀,” <<청년>> 19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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