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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교리46

기독신보 1937년 4,5월 사설들 이것으로 사설을 정리하는 작업이 끝났다. 내가 맡은 부분 중 마지막은 1937년 4,5월 분으로, 지난 번에 이어 당시 교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이다. 비판의 내용이야 다 맞는 말들이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대상도 지적하지 못하고 퍼부어대기만 하는 것은 단말마적인 독설로 읽힌다. 이 신문은 1937년 7월에 폐간되었다. 1937년 4월 21일 (제1115호) 분류: 사설 제목: 악한 누룩을 막자 오늘날 조선 교회에는 정책의 누룩, 수완의 누룩, 이용의 누룩 등 악한 누룩들이 많이 들어앉았다. 어떤 누룩은 교회 내에 무슨 부를 만들어 자기 기관 사업에 이용하고 선전하며 분규를 일으키고, 어떤 누룩은 자기 밥줄이 떨어질까 봐 갖은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다 쓰고 단말마적 행동을 하고 있다... 2009. 1. 11.
기독신보 1936년 1,2월 사설들 1935년 말의 의 사정에 대해서, 2권에는 ‘기독신보사건’이라는 명명 하에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165-168) 193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필순 목사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발행권을 둘러싸고 계파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교회들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얻어 경영 자립을 꾀했고 한국인 직원을 대거 채용하여 편집진을 보강했다. 이같은 ‘혁신적’ 조처는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예수교회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1935년 9월 조선예수교서회 이사회에서는 유억겸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전필순에게 사장직을 인계하도록 했으나, 전필순은 이를 거절하고 사무실을 종교 2가 서회 건물에서 수송동으로 옮기고 ‘재혁신’을 선언하며 독자.. 2009. 1. 11.
기독신보 1934년 6,7,월, 1935년 1,2월 사설들 자료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데(또 위험한데), 나는 이 시기 기독신보 사설들을 읽으면서 1930년대 한국 개신교의 지적인 쇠퇴를 느낀다. 당시 교계 여론을 이끄는 교계 지성인들의 사설에서 거의 창조적인 생각은 나타나지 않고 상투적인 논리와 언어의 반복을 통해서 지면만 잡아먹는 글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감각인데, 그 감각을 자료를 통해 ‘증명’하는 것은 까다롭다. 1920년대부터 한국 청년들의 두뇌는 개신교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른 집단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1930년대의 지적 쇠퇴는 사실 그 때 예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두뇌가 어디로 몰리는가’라는 것, 문화 현상의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2009. 1. 11.
기독신보 1933년 4,5,12월, 1934년 1월 사설들 이 시기 기사엔 그렇게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없었던 것 같다. 어려운 시기의 지지부진한 교회 상황이 보이고, 그 사이에서 비방의 표현이 간혹 눈에 뜨이는 정도. 대부분의 사설들은 장광설이나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기할 정도로 핵심이 빠져 있는 글들이다. 1933년 4월 5일 (제18권 제14호/제905호) 분류: 사설 제목: 新入生 諸君에게 이번 종교(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훈계할 것은 유물주의사상으로 흐르는 시대사상에 휩쓸리기 보다는 종교를 알기 위한 신중한 태도를 갖고 예수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기독교를 알아보았으면 한다. 1933년 4월 5일 (제18권 제14호/제905호) 제목: 宗敎敎育初步로 宗敎講座를 組織 -從來學科偏重을 打破 시대가 종교적 교육을 요구하는 바, 이번 경기도 학무.. 2009. 1. 11.
기독신보 1932년 12월 사설들 1932년 12월 한달치인데, 이 달에는 의 특종이 있다. 12월 14일 “이세벨의 무리를 삼가라”는 사설이 그것. 이 사설은 이용도 목사와 (그와 관련되었다고 주장된) 신앙 공동체들에 대한 최강의 단죄이다. 여러 사람들이 언급되지만 가장 거물이자 주 타겟은 이용도 목사이다. 이 이용도 때리기는 이용도 목사의 잘못을 직접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도와 관련된 한준명, 그리고 여선지자(유명화)에 대한 비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열한 방식이다. “이세벨의 무리”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표현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이세벨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계기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논쟁 자체가 이후 교회사를 장식하는 이단 논쟁의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 2009. 1. 11.
기독신보 1932년 7,8월 사설들 이번에 본 내용들은 그저 그렇다. 여름이라 수양회, 강좌 등을 열심히 하자는 이야기가 주로이고 눈에 띄는 내용은 없다. 마지막에 실린 토마스 목사 기념관 사설에서 나오는 피의 은유가 강렬한 느낌을 주는 정도. 모르는 단어를 좀 익혔다. 그 중에서 ‘손도’라는 표현은 전공과 상관있는 단어다. 편의―대(便衣隊)[―/ ―이―]【명사】 예전에 중국에서, 무장하지 않고 평복으로 적지에 들어가,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상황을 살피던 부대. 손도(를) 맞다 【관용구】 오륜에 벗어난 행실이 있어서 그 지방에서 쫓겨나다. 남에게 배척을 당하다. 1932년 7월 6일 (제17권 제48호/제866호) 분류: 사설 제목: 實力을 길르자 -各修養會를 앞두고 이 복잡한 사회에서 완전한 인격을 갖추고 성공하려면 실력준비에 힘써야 하.. 2009. 1. 11.
기독신보 1931년 11,12월 사설들 이번에 읽은 부분은 1931년 11월과 12월 기독신보.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당시 경제 상황이 안 좋아 교회 운영도 어렵고 신문사 운영도 쉽지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는 정도이다. 11월 4일의 추수감사절에 대한 사설은 좀 기만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감사헌금을 중국에 관련된 일에 사용하고 싶다는 것인데, 말을 빙빙 돌린다. 감사는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라는 강압적 명제에서 시작해서, 그 시기가 우리가 복음을 처음 들은 시기, 다른 말로 선교사의 입국 시기로 정해져야 한다고 강변한다. 감사절이 선교사의 입국 날짜로 정해진다는 게 설득력 떨어지는 주장인데다, 사실 역사적으로 그 시기에 선교사가 들어왔는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미국의 감사절 날짜를 사용하면서 그렇게 둘러댄 것일 뿐이.. 2009. 1. 11.
기독신보 1931년 7월 사설들 신문읽는 모임에서 1930년대 기독교 신문을 읽고 있다. 1931년 7월달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응들이 좀 있다. 일단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문제. 이것은 몇 해 전 강의석 군이 제기한 문제와는 비슷한 면도 있지만 좀 다른 이야기인데,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고집하면 일제의 교육 정책 아래서는 학교의 자격이 제대로 된 고등학교로 인정되지 않아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문제가 생긴다. 학생들의 앞날이 달린 문제이기에 목숨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종교학교 교장인 선교사들은 ‘내가 이 학교 선교하러 세운 건데, 그걸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버티는 상황. 이 문제에 대한 사설의 내용은 파업은 노사간에서나 있는 거지 교육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불상사이니 사제간의 정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2009. 1. 11.
기독신보 1921년 10월 사설 한국 기독교사 자료를 읽어나가는 “자료연구회”라는 모임에 있었다. 약 3년 정도 하면서 공부를 많이 배운 모임이었는데, 물론 내가 미국으로 뜨면서 빠지게 되었다. 이번에 들어와서 자료 강독에 하루 참여하였고, 자료 정리도 좀 도와드렸다. 요즘은 이렇게 옛날 기독 신문의 사설을 읽어나간다. 1920년대의 기독신보이다. 잘 읽히지도 않는 글을 꾸역꾸역 읽어가는 것은 무미건조한 작업이기도 하다. 내용도 평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가 막힌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이런 범상한 자료들을 소화하는 과정을 건너뛰어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1921년 10월 기독신보 사설 내용을 요약한 것인데, 이 달에는 성서에 관한 주장을 실은 네 번째, 다섯 번째 글이 눈에 띈다. 성서가 하느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저술한 .. 2009. 1. 11.
사도신경,주기도문(1894) 밑의 찬양가(1894)에 실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다. 가장 초기 형태의 번역인데, 지금 쓰이는 것과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2009. 1. 11.
채필근의 종교학 관련 기사들 채필근이 에 기고했던 글 중에서 종교학이나 다른 종교에 관한 글들. 채필근, “한국교회에 미친 유교사상”, 44호(1961년 6월): 10-17. 채필근, “종교신앙과 종교연구”, 49호(1930년 1월): 7-13. 채필근, “종교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science of Religion?)”, 71호(1933년 9월): 9-13. 2008. 5. 25.
박형룡의 <종교론> 박형룡이 1937-8년에 6회에 걸쳐 에 연재한 "종교론". 그가 유학시절 배운 종교학 수업 내용이 정리된 노트의 성격이 강한 글로, 당시 종교학의 일반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다. (1)박형룡, “종교론”, 제91호(1937년 1월) (2)박형룡, “종교론”, 제92호(1937년 3월) (3)박형룡, “종교론”, 제93호(1937년 5월) (4)박형룡, “종교론”, 제95호(1937년 9월) (5)박형룡, “종교론”, 제97호(1937년 11월) (6)박형룡, “종교론”, 제98호(1938년 1월) 2008. 5. 25.
예수교 있는 고을 “내보”, 『대한크리스도인 회보』, 3-9, 1899.3.1 개신교인들 많은 고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재미있는 기사이다. 이만열의 지적(, 433)처럼, 이 기사를 통해 개신교인들이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의로운 모습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한 항거'는 '외세의존적 성격'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상임에 유의해야 한다. 개신교인들이 관리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비빌 언덕이 있음을 의미한다. 관에 복종해야 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개신교인들은 정부 말고도 다른 '힘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신교를 통해 찾을 수 있었고, 그 외부적 힘이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 2007. 6. 22.
창세기 해석 초기 개신교인들이 창세기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 1. 1897년 12월 31일, 정동교회에서 개신교가 신문명의 상징이었던 시절, 정동교회 청년부에서는 남녀가 동등한가의 주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이 토론회에 대해서는 와 두 기사가 있는데, 전자의 자료에서 종교적 해석의 측면을 더 잘 집어낸다. 1-48 (1897년 12월 29일) 4면을 보면, 참석자 중 김연근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초에 남녀를 내시매 음양이 서로 배합이 되었으니, 음이 없으면 양이 쓸데없고 양이 없으면 음이 쓸데없나니 남녀가 동등하다.” 반면에 조한규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펼쳤다. “성경에 가라사대 남자가 여인의 머리가 된다 하고,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셨으며, 아담을 도와주게 하사 한 .. 2007. 6. 11.
초기 개신교 의료의 영향과 의미 초기 개신교 의료의 영향과 의미 아래의 자료들은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의료선교와 관련된 것으로, 그 것이 단순이 인간주의적 치료 행위나, 선교를 위한 방편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에게 서구의 과학적 우월성을 표방하는 ‘문명’의 상징으로, 또 전통종교의 주술적 행위를 압도하는 ‘치병 관리’로 인식되는 계기로 작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James Huntly Grayson, Early Buddhism and Christinity in Korea (E. J. Brill, Leiden, 1985), p. 105.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다른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의 선교사역을 임명받았을 당시,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보수적인 정부를 한시적으로 전복했던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왕족.. 2007.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