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읽는 모임에서 1930년대 기독교 신문을 읽고 있다. 1931년 7월달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응들이 좀 있다. 일단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문제. 이것은 몇 해 전 강의석 군이 제기한 문제와는 비슷한 면도 있지만 좀 다른 이야기인데,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고집하면 일제의 교육 정책 아래서는 학교의 자격이 제대로 된 고등학교로 인정되지 않아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문제가 생긴다. 학생들의 앞날이 달린 문제이기에 목숨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종교학교 교장인 선교사들은 ‘내가 이 학교 선교하러 세운 건데, 그걸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버티는 상황. 이 문제에 대한 사설의 내용은 파업은 노사간에서나 있는 거지 교육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불상사이니 사제간의 정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졸나 나이브한 주장. 전교조를 인정할 수 없는 요즘의 보수층의 정서와 그대로 통한다.
당시 기독교를 겨냥한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반대 사설에도 전형적인 보수층의 논리가 보인다. 사회의 문제는 인정하지만 그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폭력은 안 되며 민중이라는 주체는 우민(愚民)이므로 문제가 있다는, 역시 나이브하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오는 보수층의 논리들의 집약이다.
만보산 삼성보 사건에서 유래한 한국 내 중국인들에 대한 폭동에 대한 사설은 실제로 일어난 참상을 될 수 있는 한 축소한다. ‘불상사’에 대한 사회 각계의 유감과 위로의 움직임을 전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이 할애되어 있는 반면에 불상사의 내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정신을 강조하며 이참에 중국 선교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은 생뚱맞다.
<基督申報> 사설/ 방원일(06.9.18)
1931년 7월 1일 (제16권 제27호/제813호)
분류: 사설
제목: 敎育界의 不祥事
(一)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장하는 투쟁인데,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보아 그 목적은 찬성하나 그 방법인 파업(스튜라익)은 크게 불가하다. 그리스도는 노사간 균등하게 지낼 것을 가르쳤는데, 그리스도인은 그 중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불상사를 막도록 노력한다. (二)교육 사업은 그리스도의 무사를 길러내 그리스도 왕국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인데, 최근 여러 학교(여자상업, 동덕, 보성, 송고, 영생, 이화, 그리고 시골 보통학교까지)에서 동맹휴학이라는 불상사가 있었다. 노사간에나 쓰는 무기를 학생들이 쓰게 된 것에는 사제간의 도덕과 사랑이 결여된 까닭이다. (三)종교학교의 파업 조건은 대개 선생을 배척하고 종교의 과목을 빼라는 것이다. 목적을 관철할 여러 방법이 있는데 파업을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으며, 종교학교에서 종교 공부를 안 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四)사제 간의 윤리를 되살려라.
1931년 7월 1일 (제16권 제27호/제813호)
제목: 反宗敎運動과 우리의 主張(六)
필자: 崔錫柱
五. 유물론적 사회운동의 결함(이어서) -(2)그들은 이기주의자들로, 자기 주의만이 제일이고 자기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루한 바리새인보다 더하다. (3)그들은 폭력을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전부로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폭력을 가지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 방법으로 삼은 것은 자기모순이다. 인류사에서 폭력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남겼을 뿐이고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것은 위인들의 업적들이다.
六(<-五). 우리의 主張 -우리의 주장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것인데, 종교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현재에 만족하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물론자는 변화가 전부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즉 환경만 갖추어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변화의 근본이 내부 개혁에 있다고 주장한다.
1931년 7월 8일 (제16권 제28호/제814호)
분류: 사설
제목: 夏期兒童 聖經學校
(一)하기아동 성경학교 운동은 1872년 캐나다에서 시작되어 1910년 경 미국에서 부흥하였으며 우리나라에는 1922년 선천에서 삼우엘 부인이 개교한 것이 효시가 되어 불과 9년 사이에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二)이 운동이 방방곡곡에 미칠 정도로 발전하려면, 인력과 물질이 필요한데, 이는 운동 실무자들이 개시 이전에 각 교회, 종교단체, 학교, 신문잡지와 협조한다면 해결될 수 있다. (三)운동의 목적을 잊지말고, 창조적으로 하고, 미신적인 방법을 쓰지 말며, 생명의 힘으로 진행할 것.
1931년 7월 8일 (제16권 제28호/제814호)
제목: 反宗敎運動과 우리의 主張(七)
필자: 崔錫柱
六. 우리의 主張-(1)사회개조는 개인 혁명에서 되어가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민중만이 제일이라고 하고 특출한 개성의 존재를 부인하니 자멸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없는 평등주의는 무수한 우민들을 지어내고 하나님있는 데모크라시는 무수한 천재를 지어낸다. (2)사회주의는 폭력이라는 무기로 싸우기를 가르쳐왔으나, 우리의 방법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3)진정한 운동은 자기를 제물로 내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원칙에 의지해야 한다.
七(<-六). 맛치는 말-현재의 불완전한 조직을 기회삼아 사사로이 배를 불리고 동포와 인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자본가든, 종교가이든, 사회주의자든 망할 것이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함에는 ‘하나님 있다’는 믿음 위에 터를 세우고 사랑과 십자가의 법칙으로만 인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1931년 7월 15일 (제16권 제29호/제815호)
분류: 사설
제목: 中國人에 대한 우리의 態度
(一)중국과 우리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등질 수 없는 이웃이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포가 백만이요 조선땅에 들어와 사는 중국인이 팔만을 헤아린다. (二)이번 만보산 삼성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 동포들이 조선 안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불상사를 끼쳤다. 곳곳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하기도 했다.1) 각계의 유지들이 이에 대해 유감의 성명을 발표하고 위문품을 모았다. (三)이 불상사를 계기로 더 서로를 이해하고 믿음과 의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四)그리스도의 정신이 통하였던들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산동과 만주의 선교가 더 중히 보인다. 두 민족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실현하기를 바란다.
1931년 7월 15일 (제16권 제29호/제815호)
제목: 니젓는가 일헛는가
필자: 채필근
一. 무엇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별명이며 우주의 원리며 생명의 근원이며 사람의 본성이며 사회의 실질이며 도덕의 표준이며 진리의 자체며 종교의 신수(神髓)며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성령의 강령이다.
1931년 7월 22일 (제16권 제30호/제816호)
분류: 사설
제목: 필자와 독자 (上)
(一)필자와 독자가 서로를 위하여 있다는 입장과 필자는 독자이고 독자는 필자라는 입장 양 쪽 이론을 모두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하겠다. (二)글쓰기에서 배척해야 할 것은 인간의 동물적 감정을 이용하여 인간 본유의 고상하고 거룩한 감정을 썩이는 가인파 문학이다. 우리가 한사코 할 것은 인간의 고상한 감정을 흥기시키고 거룩한 생영을 움직이어 그 생명이 하나님의 천지에서 활약할 수 있게 만드는 아벨파 문학, 즉 거룩한 문학이다. (三)악한 붓을 물리치고 거룩한 붓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1931년 7월 22일 (제16권 30호/제816호)
제목: 니젓는가 일헛는가 (二)
필자: 채필근
二. 조흔선생의 니아기 -성질이 완강한 한 학생을 스스로 뉘우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덕을 꾸짖었던 선생님과, 그 사정을 알고 선생을 찾아간 아버지와 뒤늦게 뉘우친 학생 셋이서 뒷산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1931년 7월 29일 (제16권 제31호/제817호)
분류: 사설
제목: 필자와 독자 (下)
(一)독자는 읽어서 해될 것과 읽어서 도움이 되는 것을 가려 읽어야 한다. (二)읽는 것에는 생의 진취와 윤택과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 (三)우리는 다독하되 선택할 것이며, 우리말로 출판된 것 중에 읽을 것이 없다고 단안하지 말 것이며, 또한 자자구구를 정성들여 정독할 것이다.
1931년 7월 29일 (제16권 제31호/제817호)
제목: 예수의 罪惡觀
필자: 金弼秀
죄의 원인은 자아를 남용함에서 비롯한다. 죄의 발생은 가정, 즉 아담과 하와 부부간으로부터 종인(種因)하여 전세계에 파급되었다. 하와는 여자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으며 아담은 정견이 없는 남자라 하겠다. 죄에 대해서는 공의를 엄정히 집행하면서도 사람은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가 죽음에 이르렀으니, 죄인이 예수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 예수의 죄악관은 ‘죄는 미워하시되 인간은 사랑하시다’로 결론할 수 있겠다.
지양 06.09.19 14:34 | ||
어떤 부분은 지금 강남의 한 교회에서 돌려읽는 내용이라고 해도 믿을만하군요. :) | ||
└ | 房家 06.09.19 21:32 | ||
어떤 부분일까요,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사고방식이 많이 보이니 여기저기 해당되는 내용이 많죠. | |||
피아 06.09.19 19:57 | ||
예전에 종교교육에 대해 한창 뉴스되고 있을 때, 기독교 계통의 몇몇 학교들은 이럴거면 학교 문 닫아버리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던 글을 본 기억이 나네요. 종교교육이 신앙이 아닌 교양으로의 교육이 된다면 사립 뿐만 아니라 국공립에서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신앙교육은 각 종교단체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준비해야 할게 많겠지요..?! 가장 시급한건 법도 그렇고, 교과서가 아닌가 싶어요. | ||
└ | 房家 06.09.19 21:38 | ||
맞아요, 그랬죠. 그러고보니 학교 문닫는다는 생떼도 역사성이 있는 거네요. 종교를 일반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종교학을 가르치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이고, 그게 제 꿈(!)이걸랑요. 일반 대학에서 종교학을 교양으로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고등학교에 있는 종교 과목이 종교학 수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에요. (고등학교 종교 시간에 기독교를 강요받는 암울한 기억도 있고해서) 한 때 제 꿈이 고등학교 종교학 선생님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현실상의 어려움으로 접어야했죠. | |||
└ | 피아 06.09.19 22:34 | 신고 | |
이번에 교생실습을 나갔었는데 거기서 참 많이 느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이렇게 실습해서 자격증따도, 과연 종교 과목으로 임용되서 종교학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였어요. 오직 종교만 가르치는. 그쪽 관련 예배 준비나 이런거 안하고, 보통의 국어 영어 선생님들처럼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언젠가 될거라 생각하며 작은 희망(?)을 갖고 있지만 한때 그 문제 때문에 함께 실습하던 친구들과 머리 싸매고 고민했었더랬지요.. (우리가 한 건 결국 인력낭비인거야? 이러면서-_-) | |||
└ | 房家 06.09.20 16:30 | ||
설..마, 종교학으로 교생실습을 다녀오신 건가요? 이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있었네요.^^ 고민 정말 많이 하셨겠어요. 현실적으로 종교적 이해관계가 있는 재단 아니면 종교 과목을 개설하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그런 분들에게 종교학이라는게 반가울 수가 없는거고... 그래도 대학교에 종교학 교과서에 대한 의뢰 많이 들어오고 하는 걸 보면 학문적 종교 교육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분명 있긴 하거든요. 현실에서 조금만 물꼬를 트면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되지 않을까하는... (저는 매사에 워낙 낙관주의자라...) | |||
└ | 피아 06.09.21 00:54 | 신고 | |
주름은요.. 저야말로 학년말인데도 버벅거리는 학부생인데^^;;; 그래도 제가 간 학교(기독교계통)는 다른 종교 가르치는 것에 그리 안좋게 생각하거나 그런 쪽은 아니었어요. 다만 기독교 쪽 비중이 더 높을 뿐이죠. (교과서만 봐도..) 다른 학교는 어떨지 모르지만 어디든 다 겉핧기 정도 아닐까 싶어요.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내에 그런 날이 오기를 저도 기대해봅니당. ^^ | |||
가고일 06.09.22 13:29 | ||
고등학교를 "천도교" 산하 재단에서 다닌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라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종교학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죠;) 일단 종교학교니 종교시간이 있습니다. 경전도 전교생에게 다 지급이 되지요. 시작은 일반적인 천도교의 방식입니다만 특별히 종교를 강요하는 내용은 없없습니다. 담당교사도 인간의 심성을 담당하는 차원에서 그냥 도덕시간의 연장 정도로 생각해 달라 라는 말이 있었지요. 그래서 종교시간 자체에 대해서는 별 문제는 없었던 듯 하지만 (특별한 종교가 없는 제 입장에서는요) 속으로 들어가면 좀 양상이 달라집니다. 개신교와 천주교 쪽이 나름대로의 동아리를 만들어 "비밀리"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원칙적으로 타종교동아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걸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카타콤으로 피해다니는 로마시대 크리스찬을 보는 느낌이랄까.....밖에서 보는것과 정반대 상황이 연출되니 재미있기도 하고 오히려 그편이 다른데보다 순수해 보이기도 하더군요. 개신교쪽에서는 모임에서 기도를 하면서 "이 마귀의 공간에서 힘을 잃지 않게 지켜주시옵고..."정도의 기도문도 어렵잖게 들을 수 있었지요. | ||
└ | 房家 06.09.22 21:57 | ||
기독교가 비주류종교가 되는 상황, 재미가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기독교계가 아닌 종교 수업의 방식은 꽤 신중합니다. 불교계나 원불교계 학교의 종교 시간도 그런 것 같아요. 자기 종교를 들이대어서 (특히 기독교계) 학생의 반발을 사는 일 없이, 삶의 지혜로서 스며들기를 유도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고려한 현명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한동안 동국대학교에서도 기독교 동아리가 총동아리연맹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학교 방침 때문에 기독 동아리가 "지하"에 내려가버린 건데, 불교가 기독교와 맞서면서 상대방의 나쁜 버릇(배타성)까지 배워버렸다는 씁쓸한 대목이죠. 그렇게 되면 반응은 말씀해주신대로죠. 카타콤베에서 기도를 하며 전투력을 배양할수밖에 없게 되고, 이게 때때로 나타나는 갈등의 자양분이 되죠. '마귀의 공간'에 대한 기도 이야기를 해주시니 종교학과를 다니는 개신교인 학생들 생각이 납니다. 물론 종교학이 신앙을 박해할 리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착하게 교회만 다녀온 학생에게는 종교학을 가르치는 공간에서 4년을 보내는게 신앙에 대한 시험에 다름아니죠. 그래서 과내 기독동아리 따로 만들어 모여서 "힘을 잃지 않게 지켜주시옵고"라는 기도를 하면서 학교를 다닙니다. 종교학이 자신의 신앙을 약하게 하지 않게 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되는거죠. <다니엘 학습법>으로 유명한 김동환 전도사의 글에서는 (비록 학점은 최우수이지만) 그렇게 종교학과를 다닌 분위기가 풀풀 느껴집니다. | |||
김재홍 06.09.28 01:02 | ||
사회주의자를 바리사이파에 비유하다니, 당시 프로테스탄트 계의 성서에 대한 무지가 보이는군요. 바리사이파는 종교적 민족주의이고, 사회주의계의 反 기독교운동은 피안속에서나 사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비판하는 운동인데 말입니다. | ||
└ | 房家 06.09.28 11:21 | ||
당시와 지금의 개신교 지도층의 인식이 거의 비슷하다는(아니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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