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사 자료를 읽어나가는 “자료연구회”라는 모임에 있었다. 약 3년 정도 하면서 공부를 많이 배운 모임이었는데, 물론 내가 미국으로 뜨면서 빠지게 되었다. 이번에 들어와서 자료 강독에 하루 참여하였고, 자료 정리도 좀 도와드렸다. 요즘은 이렇게 옛날 기독 신문의 사설을 읽어나간다. 1920년대의 기독신보이다. 잘 읽히지도 않는 글을 꾸역꾸역 읽어가는 것은 무미건조한 작업이기도 하다. 내용도 평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가 막힌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이런 범상한 자료들을 소화하는 과정을 건너뛰어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1921년 10월 기독신보 사설 내용을 요약한 것인데, 이 달에는 성서에 관한 주장을 실은 네 번째, 다섯 번째 글이 눈에 띈다. 성서가 하느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저술한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서술된 것이라는 기본 입장을 지닌 글이다. 한국 개신교회의 입장치고는 진보적이다. 한국 교회가 경직화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이었다. 1925년인가 1926년 쫌에 성서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100% 하느님 말씀이라는 입장이 교회에서 공식 발표되고, 그게 지금의 문자적 신앙으로 계속 흘러오게 된다. 그에 비하면 1921년의 이 글은 꽤 균형 잡힌 입장이라고나 할까. 성서에 있는 인간 문화를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1921년 10월 5일(제6권 40호/제304호)
제목: 宗敎的生活
종교적 생활은 행위와 함께 순수한 신념을 포함해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정결한 것은 인애(仁愛)와 자주(自主)로 설명된다. 인애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고, 자주는 스스로 세속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태도에서 인애를 배울 수 있다. 또 최근에 불건전한 비인정인 반종교적인 사강과 행위가 많으므로 이런 것을 멀리하는 것이 자주이다.
1921년 10월 5일(제6권 40호/제304호)
제목: 祝賀基督申報
필자: 昌原 鄭基皓
기독교의 교화로 전지구상에 광명을 선전하는 기독신보를 축하함. 기독신보를 君
으로 의인화하여 여러 가지 찬양을 함. “君의 無義主義는 삼천리 英靈江山을 위하여 희생하며 君의 熱血의 交通은 팔만리 세계를 궤도삼아 순환할지어다.”
1921년 10월 12일(제6권 41호/제305호)
제목: 光成高等普通學校 奉獻式에 赴하야
필자: 本社特派員 吳應千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가 시설을 갖추고 봉헌식을 함. 교장 김득수의 보고에 따르면 총지출 8만원에 교실 259평, 교사 15명, 학생 340여명의 규모이다.
1921년 10월 19일(제6권 42호/제306호)
제목: 聖經에는 生命이 잇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인데, 이전에는 하느님이 인간의 힘을 빌지 않고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성경의 표현들이 인간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즉, 신의 영이 인간을 인도하여 신인합동의 감화의 결과가 성경이라고 보는 것이다.
(1)창세기는 종교적 민족이 이 세계를 해석하여 그 기원을 해설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2)법률에는 희생의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 인류의 죄악에 대한 신의 구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3)구약의 역사적문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현재 개화한 민족들이 폐기한 풍습들도 있지만 신을 향한 인간의 노력들이 담겨 있다.
1921년 10월 26일(제6권 43호/제307호)
제목: 聖經에는 生命이 잇다
(4)지혜문학은 히브리인들이 종교적 박해로 어려움을 겪을 때 생겨난 것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특히 곤란한 시기에 교훈을 주는 것이다. (5)긴 연대에 걸쳐 여러 편의 예언서가 있었다. 예언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의 곤란을 당할 때와 도덕적 위기를 맞이할 때 신의 지도 하에 국민을 이끌려는 노력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언서는 신의 말씀을 국가 문제와 국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할 지를 알려준다. (6)찬미의 노래는 세계 제일의 종교적 민족의 향상심과 찬미와 예배와 가사 등이 담겨 있다. (7)아가와 같은 우미한 시가도 있다.
흰숲 04.07.09 09:39 | ||
일부 한국 개신교회의 경직성은 저를 항상 가슴아프게 합니다. 그것이 192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군요... 전례나 형식에 치중하지 않고 성서 말씀에서 근본을 찾고자 하는 태도는 개신교의 큰 장점이지만...문자적 신앙에 매몰되는 것은 어쩌면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근본주의 색채가 짙다는 일부의 비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
└ | 房家 04.07.09 23:44 | ||
여러가지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합니다. 1920년대는 삼일운동의 실패 이후 교회의 정치적 참여가 좌절되고 세대간 갈등이 표출되던 시기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기독교를 비판하기 시작하던 것도 20년대부터입니다.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를 비롯한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한 사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자연히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가 많았습니다. 어찌보면 교회의 위기상황이었죠. 밖에서 비판을 받고 안으로는 젊은 활력을 잃고요. 이전까지는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신문화의 통로로 인식되던 기독교가 이제는 구시대의 유산으로 비판받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른들과 박형룡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신학이 당시 새로 진보적 신학을 공부하고 들어온 세력을 물리치고 교회 권력을 장악합니다. 언젠가 소현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테두리를 강화하는 선택을 한 것이죠. | |||
└ | 흰숲 04.07.10 09:20 | 신고 | |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구만요... 일견 이해가 됩니다. 공동체의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테두리를 강화하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죠. 문제는 그것이 고착화될 때 위험하다는 거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