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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개신교 금주론 자료들 초기 개신교의 금주 금연 운동에 대한 자료가 눈에 띄어 몇 개 정리해 보았다. 요즘 교인이 가지는 태도(기독교와 술2 참조. 그 글에서 실린 "에익 이놈의 술!"이라는 포스터는 1920년대 금주 운동 때 사용된 유명한 그림이다)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 금주에 대한 글들은 대부분 사회 경제적 이유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에 비해 아래의 글은 상당히 과격하게 나아간다. 술의 문제를 영혼 구원의 문제와 직결시키고 있다. 만일 종내 회개치 못하고 술만 먹다가 죽으면 영혼이 지옥으로 갈 터이니 이것이 참 무서운 일이라. 우리 주 예수를 믿던 사람은 만일 수화(水禍)에 몸은 죽더라도 영혼이 하나님께 갈 수 있고 호랑이나 사자에게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께러 갈 수 있거니와 술먹다가 죽으면 .. 2009. 1. 11.
1960년 선거 포스터 1960년 3월 15일 선거를 앞둔 자유당 선거벽보이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2005), 173쪽에서 얻은 그림. “백만 기독교도는 두 분을 세우자”는 표어 아래, 개신교인들에게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뽑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몇 달 후면 이명박 장로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될 것이다. 거기엔 이승만 장로에게 가졌던 희망도 실려있을 것이다.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종교인의 정치적 견해 역시 표명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견”으로서 제시되어야하지 종교적 진리로 제시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는 정치적 정세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다. 지난 대선에서 “불심(佛心)으로 대동단결”이라는 구호가 등장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불교인 중 소수 의.. 2009. 1. 11.
1930년대 개신교 결혼 1930년대의 결혼식 사진이다. 이전에 내가 쓴 논문에서의 주장 중 하나가 한국의 개신교 결혼식은 혼합적인 의례라는 것이다. 이 사진의 복장은 그 혼합적인 양상을 잘 보여준다. 신부의 옷에 주목할 것. 하얀 소복이다. 거기다 하얀 면사포를 썼다. 면사포는 서구식 결혼을 상징한다. 내가 알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20세기 초반 한 미국 여선교사가 “진짜 개신교식 결혼”을 올리게 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고민끝에 면사포를 만들어 씌웠다. 그렇게 시작된 전통 복장에 면사포를 씌운 신부 복식은 이후 수십년간 유지된다. 복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1920년대의 개신교 의례 지침서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예복이 신구교체시기를 맞아 일정한 제도가 없이 혼잡무장한 것이 유감스러움. 그러나 세계통용예복을 사용할 .. 2009. 1. 11.
선교사의 한국 여행 가장 초기의 개신교 선교사의 여행 모습이다. 참 이국적이다. 리빙스턴이나 다름없는 복장을 하고 우리나라 각지로 “모험”을 떠나는 선교사의 모습이 어찌나 낯선지... 그들에게 선교는 오지의 탐험이었다. (사진 출처: [사진으로 읽는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2009. 1. 11.
할렐루야 기도원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유명한 기도원이다. 2009. 1. 11.
휴거설 2 휴거설을 주장하는 한 전단지.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애매하게 되어 있어 어느 교회 소속인지는 잘 모르겠다. 같은 전단의 앞뒤면인데, 스캔하면서 색이 다르게 처리되었다. 無指紋 05.04.25 00:22 와, 저 위에 전단지의 앞 부분은 오래 전에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니까 하여간 오래 전입니다. 저 전단지 뿌리던 분은 좀 특이했는데,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려면 천국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면서, 뭔지 모를 말을 천국의 언어라며 끝없이 웅얼웅얼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매우 반가운 자료입니다. └ 房家 05.04.25 01:42 기억력 대단하세요! 이건 휴거설이 휩쓸 때니까 1990년대 초반(1992년일 가능성이 큼)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받아서 구석에 짱박아두.. 2009. 1. 11.
세계중앙기도원 치병에 중점을 두는 전형적인 한 기도원의 전단지 2009. 1. 11.
휴거설 1992년엔 10월이면 종말이 온다는 휴거설로 우리나라가 시끄러웠다. 그 때 군바리들은 휴거를 기다렸다고 하던데...^^ 난 그 때 종교학과를 꿈꾸는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모아둔 종교 전단지 묶음에 용케 그 때의 것이 하나 남아있다. 다미선교회이 것은 아니고 다베라선교회라는 곳의 전단이다. 당시 이 운동에서 이 선교회의 위상은, 찾아보아야겠다. 첫 번째 사진에서 날짜가 나중에 기입되어 있는 게 재미있다. 전단 인쇄할 당시에는 그 부분에 대한 예언이 내려지지 않았는지, 단순한 오타인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 사진에는 교회 어린아이에게 내려진 “인치심”이라는 계시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2009. 1. 11.
초기 모습을 담은 사진들 1. 초기 교회 예배 모습 한국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남자 교인과 여자 교인이 뒤섞여 예배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남자 그룹과 여자 그룹 중간에 장막을 치고서 예배를 보는 것이었다. 상당 기간 이러한 형태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초기 교회 건물 양식 중에 "ㄱ자 예배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건물을 ㄱ자로 지어서 ㄱ의 꼭지점에 목사가 위치하고 건물의 두 변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각 남자 신도와 여성 신도들이 앉아 있는 양식이다. (지금은 이 형식의 예배당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진 출처: [사진으로 읽는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 2. 십일조 할아버지 전진규 목사의 부친인 전사명 옹은 철저한 십일조 헌금을 드린 분으로 유명하여, 십일조 할아버지라 불린다. "한국 교회에 십일조가 .. 2009. 1. 11.
산타클로스가 지금의 모습으로 되기 전 을 읽으며 얻게 된 산타클로스 그림들. 그가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하기까지의 변천사. 1. 잘 알려져 있듯이, 산타 클로스는 성 니콜라우스의 변형으로 탄생했다. 그 변신의 시점은 1800년대 중반이다. 이 그림은 산타 둔갑 직전의 성 니콜라우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1810년의 삽화이다.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에게 벌을 준다는(울고 있는 아이는 아마 매맞은 걸로 보인다) 주제가 나타난다. 하지만 아직 니콜라우스는 고색창연한 패션을 간직하고 있다. 주교복을 입고 있고 손에 홀을 들고 있다. 중세 성인의 도상적인 특성 그대로이다. 대중적 상상력을 통해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까지는 몇십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 이것은 1848년의 도판이다. 산타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가 막 생겨난 시점이다. .. 2009. 1. 11.
그리피스의 <한국의 안팎>중 "종교" Griffis, William Elliot, Corea, Without and Within (2nd ed.;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85[1884]), 161-71. 그리피스, , 제3부 제15장 종교 “종교에 관해 말하면,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거의 없다.” 이것은 17세기 네덜란드 개신교인의 증언이다. 1883년 가을 서울과 개항장에 몇 주 머물렀던 스코틀랜드 성직자도 하멜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구 국가들이 보통 ‘종교’라는 용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한국은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는 뭔가 다르다.”1) 그 곳에 오래 머물렀던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도, 다양한 여행객 .. 2008. 11. 18.
채필근의 종교학 관련 기사들 채필근이 에 기고했던 글 중에서 종교학이나 다른 종교에 관한 글들. 채필근, “한국교회에 미친 유교사상”, 44호(1961년 6월): 10-17. 채필근, “종교신앙과 종교연구”, 49호(1930년 1월): 7-13. 채필근, “종교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science of Religion?)”, 71호(1933년 9월): 9-13. 2008. 5. 25.
박형룡의 <종교론> 박형룡이 1937-8년에 6회에 걸쳐 에 연재한 "종교론". 그가 유학시절 배운 종교학 수업 내용이 정리된 노트의 성격이 강한 글로, 당시 종교학의 일반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다. (1)박형룡, “종교론”, 제91호(1937년 1월) (2)박형룡, “종교론”, 제92호(1937년 3월) (3)박형룡, “종교론”, 제93호(1937년 5월) (4)박형룡, “종교론”, 제95호(1937년 9월) (5)박형룡, “종교론”, 제97호(1937년 11월) (6)박형룡, “종교론”, 제98호(1938년 1월) 2008. 5. 25.
동아일보 크리스마스 기사들(1924-1939) 여기에는 그림 파일을 올리기가 여의치 않아서 엠블에 올린 것을 링크해 놓는다. 동아일보 크리스마스 기사들1(1920년대) 1920년대는 크리스마스가 서양 풍습으로서 소개되는 시기이다. 크리스마스 풍습에 대한 상식들이 소개되는 기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아직은 낯선 서양 풍속으로, 전사회적으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슷한 시기의 조선일보 기사들도 대동소이하다. 동아일보 크리스마스 기사들2(1930년대초반) http://blog.empas.com/bhang813/25244004 1930년대 들어서 한국 사회에 크리스마스는 익숙한 날이 되어간다. 기독교와 상관없이도 즐기는 날이 되어간다. 이것은 1930년대의 대중들의 소비적 감수성이 급속히 확산되었던 것과 관련이 .. 2007. 12. 13.
크리스마스 관련자료(1910년 무렵) *1910년 YMCA 성서 교실의 크리스마스 풍경 * 밴틀리트가 서재필 부인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1911년) * 1910년 양복점 광고 * 1912년 "경절을 당하여" *"크리스마스 유래"( 1924년) 2007.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