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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그리피스의 <한국의 안팎>중 "종교"

by 방가房家 2008. 11. 18.
 

Griffis, William Elliot, Corea, Without and Within (2nd ed.;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85[1884]), 161-71.

그리피스, <<한국의 안팎>>, 제3부 제15장


종교


“종교에 관해 말하면,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거의 없다.” 이것은 17세기 네덜란드 개신교인의 증언이다. 1883년 가을 서울과 개항장에 몇 주 머물렀던 스코틀랜드 성직자도 하멜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구 국가들이 보통 ‘종교’라는 용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한국은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는 뭔가 다르다.”1) 그 곳에 오래 머물렀던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도, 다양한 여행객 방문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비록 시암이나 일본처럼 근사한 의례 체계나 방대한 경전 문헌이나 수련하는 사제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에는 슬프게도 정도(正道)로부터 벗어난 타락한 종교가 존재한다. 지식인들은 얽혀있는 미신들 속에 빠져 있다. 이 미신들은 수백만 영혼들을 창조주로부터 떨어뜨려 놓아서 지적인 노예상태, 무지의 공포와 흑암 속에 묶어놓는 해로운 종교를 형성한다.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설교는 정말 “그들을 속박하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것이다.

거주민들의 신앙 기저에는 역사적 순서대로 세 층의 관념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원시 주물숭배와 샤머니즘--가시적 대상의 숭배와 비가시적인 상상의 영향력에 대한 숭배--, 유교, 그리고 불교이다.

암흑 속에 있는 한국인의 신앙의 이 세 층들은 모두 자신을 대표하는 ‘사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성스러운 건축물들의 규모와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경우 이 말이 거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대부분의 마을과 도시에서 사원들은 놀라울 정도로 작고 조악하고 썰렁하다. 서울에선 일반적인 주거지보다 큰 불교 사원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이 건물들은 단지 처마 주위에 파진 홈이나 조각, 혹은 특별한 현관을 통해 인식될 뿐이다. 마을에서 ‘사원’들은 초가집보다 나을 게 없다.

새로운 개항장인 인천에서 멀지 않은 한 마을의 사당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중앙에는  낮은 솔숲이 있고, 아홉 채로 된 마을로부터 200야드 떨어진 언덕 위에는 성스러운 구조물이 있다. 이것은 일본의 신도(神道, 신들의 길 혹은 가르침)와 비슷한 토착 종교의 상징이다. 이 건물은 원뿔형 초가지붕, 9피트의 높이와 같은 직경의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꼰 지푸라기로 만들어지고 바닥엔 출입을 위해 네모난 구멍을 낸 오래된 벌집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한국 사원의 입구는 3피트 높이의 삼각형이고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안에는 우상, 향, 그림이 없었다. 천정은 가로놓이고 뒤쪽으로 기울어진 거친 들보로 짜여 있고, 후면으로부터의 평균 높이는 4피트 가량 되었다. 입구를 향하면서 서까래에 붙어있는 뒤쪽 벽에는 흰 종잇조각들의 묶음이 걸려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 사원의 고헤이(ごへい)2), 즉 흰 종이가 달린 나무막대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종잇조각에는 신들의 영이 거한다고 생각된다. 보통 사람이 이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믿는다.

1832년에 귀츨라프는 어떠한 우상숭배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종교 의례의 수행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가 언덕 위의 마을 사당에 들렀을 때, 그 사당은 종이로 둘러진 한 칸짜리 집으로, 가운데에는 절인 생선이 놓여있었다. 우상은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금속 용이 땅위에 놓여 있었다. 기부자의 이름들이 금액과 함께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일본에선 흔한 길가 사당들은 한국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보인다. 하지만 언덕이나 산 위의 무덤, 위에 기괴한 사람 얼굴을 새긴 이정표, 색색의 천이 경쾌하게 달린 신목(神木), 정해진 장소나 사물 옆에 쌓여있는 돌무더기, 집 돌담이나 초가지붕에 거처를 갖고 있는 뱀이나 도마뱀의 해를 피하거나 먹이를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원시 종교(the primeval religion)에 중요하다.

풍수(風水)라고 불리는 중국 미신은 한국 전체에 퍼져 있어서, 백성들의 돈으로 살찌우는 무당, 점쟁이, 지관(지官) 등에 직업을 마련해준다. 어떤 한국인도 이들과 의논하지 않고 집을 짓거나 정원이나 무덤 터를 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귀신의 영향력은 항상 존재한다고 믿어진다. 언덕 위에 고정되어 있는 기둥이나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이나 쇳조각인 있는 집들이 귀신의 해로운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있는 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벌써 미국에서 온 빈 석유통이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된다. 풍수는 수많은 선생들이 백만의 말 잘듣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거대한 국가 미신 학교이다.

한국인에게 공기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에는 살아있는 악령들이 가득하다. 모든 나무, 산, 수로, 심지어는 부엌이나 굴뚝까지 터주(tutelary genii)들이 있다. 그들은 기도, 선물, 또는 모종의 참회를 통해 달래져야 한다.

공적인 문자 계층에 의해 공언되는 신앙은 고대 중국의 고전들에서 나온 공자의 윤리와 체계에 기초한다. 성인을 모신 사당들이 한국의 대도시에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유교는 도덕과 정치의 체계이지 종교가 아니다. 유교에는 진보의 요소가 없고, 다만 인간의 지성을 전형화하고 문명을 불변의 반복적 일상으로 화석화하기 위해 계산된 사유와 행위의 양식이다. 유교는 중국의 무기력과 지체된 발전에, 그리고 한국의 은둔자 같은 격리와 바보 같은 자만심에 대한 책임이 있다. 유교는 항상 기독교의 완고한 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진보의 싹을 갖고 있지 않은 이교적 불가지론이다. 그 영향력은 모두 보수적이다. 유교의 교의는 “다섯 관계”[오륜(五倫)]의 교리로 요악된다. 즉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부인, 형과 아우, 친구들 간의 관계가 그것이다. 관계가 표현되기 위해서는 의무가 뒤따른다. 이러한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무신론적이다. 유교는 모든 관계 중 최상의 관계, 즉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진리, 진보, 그리고 영적인 종교의 주적(主敵)은 유교인들이었고, 앞으로의 세대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교만을 낮추어주는 그 성격을 통해 양반들의 비참함을 일깨워야 한다.

특정한 시기에는 관리들에 의해 돼지, 양, 염소의 국가 희생이 치루어진다. 그 의식은 중국인들이 천지신령을 기릴 때 행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유교보다 오래되었지만 유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조상숭배이다. 조상들을 기리는 것, 향을 태우고 신주를 배향하는 것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반적이다. 이 체계는 너무 뿌리 깊게 박혀있어 한국인의 정신에 총체적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뿌리뽑을 수 없다. 효도와 숭배는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하나가 된다. 조상숭배는 거대한 나무이다. 그 뿌리는 원시 역사의 지층까지 뻗어있고, 울창하게 자라난 미신의 산물은 모든 집에 그들을 드리우고 있다. 그것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기독교의 도끼가 그 나무에 강하게 수없이 내리쳐져야 한다. 십계 중 제5계의 정신과 문자를 그 자비로운 약속과 함께 지키는 것은, 중국이 오래 유지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를 보존하는 소금인데, 이것은 한국에 있는 예수의 선교사들이 갖고 풀어야 할 문제이다.

불도(佛道) 또는 불교(佛敎)는 아마도 티베트와 몽골을 거쳐 4세기에 한국에 처음 들어왔으며, 6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직접 들어왔다. 불교의 황금기는 고려왕조(960-1392) 시기였다. 한반도에 전파되고 왕실의 후원을 받아서 불교는 국교가 되었다. 이 시기 승려들의 수는 많았고 영향력이 있었으며 식자층이었다. 수도원들이 많았고 사치스러웠으며 절들도 크고 화려했다. 교육과 예술이 육성되었고, 한국의 문화 수준은 지금보다 높았다.

이씨 왕조가 계승하여 왕국을 통치한 이후, 불교의 국교 지위는 폐지되었고 신앙은 타락하였고 승려들은 무식해지고 훌륭한 사찰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작년에 영국 신사가 방문한 마을의 사원은 솔숲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6평방 피트짜리 오두막으로, 측면은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로 이루어져 있고, 줄에 달린 두터운 돗자리가 문을 이루고 있었다. 평범한 자세로 앉아있는 3피트 높이의 조야한 불교 성인 석상과 전면에 놓인 구리 동전이 담긴 돌이 “절” 안에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불교가 도성 주변에서는 낮은 지위를 갖고 있지만, 어떤 지방에서는 강력하게 번창하고 있다. 어떤 인근 지역 사람들은 강한 불교도이고, 그런 곳에서는 승원과 절이 오래되고 부유하고, 머리를 민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으며, 사원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수입이 넉넉하다. 산 속에 있는 유명한 사찰에는 매년 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한다.

우상들에는 청동, 석조, 목조라는 세 등급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솜씨를 지닌다. 지금 일본 사원에 있는 부처와 그 제자들의 조상(彫像) 중 많은 것들이 원래 한국에서 온 것들이다. 그곳은 정토종의 승려들에게 오랫동안 서방의 보물나라였다.

불교는 인간적인 도덕 체계이고 고매한 성품에 대한 열망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과 동료들의 이득을 위해 선한 일을 하도록 자극을 준다. 그래서 불교는 문명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불교는 초기 에너지와 신선함으로 한 국가를 혜택으로 채우고, 예술을 배양하고, 교육을 전파하고, 길을 닦고, 휴식처를 세우고, 이득을 증진하고, 수천 가지 형태로 위안을 늘려준다. 불교는 한국에 많은 것을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금방 비관용적이고 완고하고 편협하게 되어 모든 진보를 멈추게 한 유교에 비한다면 훨씬 많은 것을 했다. 한국 문명의 최고 수준은 불교 하에서 도달했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이야기된 것들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무신론의 체계이고, 모든 숭배(cult)들과 마찬가지로 활력을 경감시키는 기생적 미신의 먹이가 되었다. 한국에서 불교의 힘은 거의 소진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농민의 심성은 부패한 것이 혼합된 토탄 늪과 닮았다. 그에게 일단 영향을 주었던 신앙은 구분되는 생명력과 형태를 갖고 있다. 신앙의 틀과 내용물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는 모든 신들을 모시고 모든 미신들을 믿는다. 그러나 의심할 것 없이 그 역시 영혼과 인간의 심성을 갖고 있으며, 그 둘을 모두 충족시키는 종교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의 그러한 형태를 얼마나 열렬히 이해했는지를 뒤의 내용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열렬히 그리스도의 순수한 신앙을 미래에 받아들일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1) Notes on Corea, by A. W. D., Shanghai, 1884. [Arthur William Douthwaite(1848~99)]


2) 고헤이[御弊, gohei]:  일본의 신도(神道)에서 신에게 바치는 종이 또는 옷감으로 된 제물. 수직 막대에 지그재그로 접은 종이조각이나 천을 붙여 늘어뜨려 놓은 것이다. 접은 수, 접는 방식, 색깔, 조각의 재질 등에 따라 여러 가지 양식이 있다. 어떻게 보면 고헤이는 가미[神]를 상징하며 신이 신사(神社)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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