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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예수님, 이판사판 아닙니까

by 방가房家 2023. 5. 28.

누가복음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짧지만 묘미가 있어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누가 복음 10장 38-42, 표준새번역개정판)

예수님은 확실히 야박하다. 주님을 모시러 뺑이치는 마르다를 두둔하지는 못할망정, 얄미운 마리아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방점은 마리아에 찍혀 있다. 그런데 후대의 기독교인들은 이 이야기를 그렇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신앙 현실상 이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읽혀졌다.


1.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라는 구절은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엉뚱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구절은 오랜 기간 성모 신앙을 뒷받침하는 성서 구절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이 이야기의 마리아와 성모 마리아는 다른 여자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신자들에겐 대수롭지 않았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로만으로도 충분했고, 그건 성모 마리아에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신앙되었다.
성모 신앙이 널리 유행했던 데 반해, 성모에 대한 이야기는 성서 안에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성서 여기저기서 성모 신앙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구절은 거의 쥐어짜내기 비슷한 방식으로 동원되었다. 이 구절도 그렇게 동원된 것 중 하나이다.

2. 기독교회가 제도적으로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역할 분담이 생겨났는데, 이런 맥락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교회의 역할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중세 교회에서 마르타냐 마리아냐라는 것은 신학 단골 논쟁이 된다. 종교인 중에는 신부와 같이 교구 사무나 교회의 재산 관리 등의 행정적인 부분에 힘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수도사처럼 수도 생활에 집중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었다. 교구 행정에 관계하는 사제들은 주님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마르다로 이해되었고, 수도 생활에 관계하는 수도사들은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했던 마리아로 이해되었다. 교회는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두 역할 모델을 통해 유지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마리아만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마르다냐, 마리아냐’라는 논쟁이 종종 있었고, 그 논쟁의 결론은 “둘 다 중요하다”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래서 위의 이야기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둘 다 맡은 바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둘 다 교회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편들더라도, 이야기의 취지는 다른 식으로 이해되었다.

3. 교회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역할론은, 한국 불교사에서 이판과 사판의 구분에 상응한다. 이판사판이라는 표현의 어원이 되는 이 불교 용어들에 대해서는, 국립국어연구원에 올라와 있는 설명을 인용한다.
'이판사판' 자체는 불교용어가 아니지만 이 단어를 구성하는 '이판'과 '사판'은 불교용어이다. '이판'(理判)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도를 닦는 일을 말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이판승' 또는 '이판중', '공부승'이라고 한다. '사판'(事判)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이것을 '山林' 또는 '産林'이라 한다)을 말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사판승' 또는 '사판중', '山林僧'이라고 한다. '이판'과 '사판'은 아주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다. '이판(승)'이 없으면 부처님의 외외(巍巍)한 가르침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잘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 이판과 사판 중 어느것이 주요하냐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 둘 다 불교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성숙한” 결론이다. 속으로야 이판이 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영적인 우월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이 마리아를 두둔한 것처럼), 그런 속내는 내보이지 않는 것이 사판이라는 파트너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다 중요한 것처럼, 이판과 사판이 다 중요하다(혹은 그래야 한다).

4. 현대의 기독교 실천론의 맥락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된다. 내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마리아와 사회 봉사를 담당하는 마르다의 두 신앙 유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교회의 대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쪽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이야기가 마리아를 위한, 그러니까 개인의 내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를 위해 궂은일을 하는 마르다의 자리 역시 기독교 실천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한국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 미미한 마당에 마리아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내적 신앙을 추구하는 마리아와 사회 봉사를 추구하는 마르다가 동시에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마리아를 편든 예수님은 확실히 야박했다. 신앙의 현실상,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편애는 종교 현실상 양 쪽을 이야기한 이야기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이판과 사판을, 내적인 신앙과 사회 봉사를 함께 이야기하는 쪽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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