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자매님과 결혼할 수 있을까

by 방가房家 2023. 5. 28.

학문의 무력함을 느끼는 일이야 허다하지만, 그걸 내 눈앞에서 가장 생생하게 느꼈던 순간은 교회다니는 여자와 연애 실패한 사람과 술을 마실 때였다. 종교가 뭔데 사랑을 갈라놓는 거냐고 피눈물을 쏟는 후배, 친구 등을 만날 때면 나는 궁색해지기 이를 데가 없다. 과연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냐는 따가운 질문에 힘써 답하는 정도였다. 속시원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내 배움과 깨달음의 일천함을 곰씹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청춘남녀에게 개신교가 뜻밖의 변수로 등장하는 일이 자주 있다. 내 주변에서도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와 비기독교인을 사랑할 수 없는 그녀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여기 지식거래소 검색해봐도 그런 사연들이 쌔고 쌨다. 그런 사연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원론적일 수밖에 없다. 비기독교인은 종교를 우습게 보지 말고 심각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독교에 귀를 기울여서, 기독교의 사랑은 그런 제한적인 사랑이 아니며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는 비신자와 복음의 의미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역공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 정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외부인의 기독교론따위로 목사님 장로님 부모님 등의 누적된 ‘권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솔직히 말해, 내 앞에 내가 사귀어야 할 “자매님”이 주어져 있고, 그녀는 개신교인끼리만의 교제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최대한 교활해지긴 하겠지만, 100% 성공할 자신은 전혀 없다. 무력하다, 무력해.

통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종교가 문제가 되는지는 자료가 부족하다. 모든 기독교인이 신자들끼와의 연애와 결혼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개신교인이 그런 경향이 훨씬 강하다.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같은 종교의 기준을 고집하는 일이 많다. 교인 중에서 그 퍼센티지를 잡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종교가 하나의 선호 조건으로 제시되는 경우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동종 직업의 배우자를 선호하듯이, 그저 같은 종교를 선호할 수 있고, 그건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자, 혹은 연애 상대방이 신자여야 한다는 율법적인 구속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수를 세기는 쉽지 않지만, 자기 신념을 통해 그렇게 연애 상대방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종교문화가 한국에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논문을 쓸 때 그런 문제점들이 머리 속에 머물러 있었다. 논문의 목적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뚜렷한 좋은 생각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해서 흐지부지 남아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걸 지금와서 다시 떠올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래도 생각을 정리해두고픈 마음이 있다. (많은 부분 논문 우려먹기가 되겠지만)

배우자를 신자로 제한하는 것은 일단은 개인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러한 선택이 옳다고 신자 내면에서 끊임없이 정당화되고 있기에. 그러나 그 문제는 한국 개신교 신앙 일반의, 공동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신자들끼리의 결혼을 정당화해온 역사가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공동체 내부의 가르침이 있어왔다. ‘자매님’을 ‘형제님’과 혼인시켜야 한다는 것은 한국 개신교 신앙의 일부여왔다. 그 종교사의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1. 이 문제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가장 놀란 것은 한국 개신교 역사 아주 처음부터 결혼 문제가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자료들은 대부분 한규무의 논문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결혼 문제 인식(1890~1940)” 에서 도움을 받았다. 내가 찾은 자료들은 이 논문의 범위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1880년대 개신교 선교가 개시된 이래 한 세대도 되지 않은 1900년대 즈음부터 개신교인 결혼 문제가 뜨겁게 논의되었으니 말이다.
개신교인 배우자를 찾는 최초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할만한 측면이 있다. 개신교인 며느리가 다른 데 시집가서 제사 안 지낸다고 얻어맞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부모된 입장에서 신자 배우자를 찾는 것은 방어적인 측면에서 수긍이 간다.

2.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율법화되면서 부터이다. 1904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자가 불신자와 더불어 결혼하는 것은 죄로 정함”이라고 규정해버리고 만다. 어떤 논의들이 오갔을까? 거기에 대해선 내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난 그저 회의록에서 그 구절을 찾았을 뿐이다. 중요한 “왜”라는 질문에 대답할 정도의 공부를 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처벌 사례들을 알 뿐이다.
“이○○와 이○○ 제 원입교인된 딸 ○○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시집보냈기로 당회에서 세 번 불렀는데 오지 아니하였으니 여섯 달 동안 입교인의 지위에서 떨어지기로 작정하다”(『부산진당회록』 1905년 7월 17일)
“ 김○○이 부모 작정한대로 안 믿는 집에 장가들고 또한 주일 잘 지키지 아니한 고로 당회에서 불러 책망하고 개유하다”(『부산진당회록』 1908년 12월 18일. 한규무,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결혼 문제 인식(1890-1940)”, p.74.에서 재인용)
어쨌든 이 시점부터 신자들간의 결혼은 한국 개신교회의 규칙이 되고 말았다. 성서에 그런 말씀이 있나? 내가 아는 한 잘 모르겠다. 그저 이것은 교회에서 시키는 바가 되었고, 어겨서는 아니되는 바가 되었다. 어기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교회 규칙이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중매보고 조건맞추어 시집보내는 우리나라의 좋지 않은 결혼 문화가 기독교적인 형태로 연장된 것이라고 파악한다. 실제로 기독교인들끼리의 중매가 많이 이루어지게 된다. 오죽하면 1917년 [기독신보]에 실린 개탄의 내용이 “우리 조선교회의 혼인범위는 구한국시대의 사색(四色)의 혼인보다도 더 좁아졌는지라” 였다.
 

3. 이전에 소현님이 남긴 답글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을 때, 밤에 경기를 한 아이를 데리고 온 한 여자가
몹시 불안해하길래, 이야기를 건넸는데, (같은 증상을 지닌 아이를 키우는 엄마니까요.)
그녀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거라고
굳게 믿고 참혹한 심정에 빠져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위로를 해주려고 해도 받아들이기 않아 제 마음이 참 안 좋았습니다.

비신자와의 결혼 금지는 그저 한국에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정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명령”이다. 어기면 천벌을 받는 무서운 말씀이다. 천벌에 이르는 신학적 정당화가 한국 교회 내에 확립되어 있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바로는, 결혼 규칙을 어기면 벌받는다는 무서운 신앙이 이미 백년 전부터 존재했다. ⌈신학월보⌋ 1902년호에서 찾은 자료에는 “복복남씨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음은 내 논문에서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우리는 1900년대 초기 복복남이라는 한 개신교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그 과정(신학적 정당화)을 볼 수 있다. 사건은 복씨가 결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결혼한 지 삼일 되던 날부터 난데없는 불이 나기 시작하여, 가까스로 불을 진화해도 계속해서 불이 났다. 그러더니 결국은 큰불이 나서 복씨의 집을 모두 태우고 노모(老母)와 일곱 살 난 아이가 불에 타죽는 일이 발생한다. 주변 사람들은 신부가 들어올 때 도깨비가 따라 들어왔다고 수군거렸다. 누군가에게 닥친 이유 모를 재앙에 대해 전통적 해석이 가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월보』의 논자는 그러한 해석에 반대하며 개신교의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복씨 사건의 원인은 “당초에 외인 혼인하는 것은 교규(敎規)를 어긴 것이라, 복형제의 화(禍) 당함은 얼만큼은 외인과 혼인한 까닭에서 난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누군가가 마귀에 들려 사고를 냈으며 도깨비같은 허황된 주장은 당치도 않다는 것이다. 도깨비라는 영적 존재가 마귀로 대체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지만, 이 설명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신자와의 결혼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을 정도의 영적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4. 세계 교회들을 더 들여다 봐야겠지만, 중간 결론 정도로 이야기하자면, 자매님들은 형제님들과 연애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믿음은 한국적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이나 간직하고 있는, 순박한 그러나 필수적이지는 않은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좋으니까.... 라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신자간 결혼을 선호한다면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집안의 반대라는 문제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나로서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그러나, 신학적인 이유에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이 기독교적이라는 이유에서 주장한다면, 나는 결단코 반대한다. 내가 아는 한 말이 안되므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