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성서의 욥기는 보고싶어하는 측면으로만 독해되는 텍스트 중 하나이다.
욥기는 한 의로운 신자 욥이 고난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갑자기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들이 몽땅 죽고, 자신은 병을 얻어 온 몸에 종기를 뒤집어 쓴 비참한 몰골로 “잿더미” 위에 앉아있는 신세가 된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욥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지만 담담히 어려움을 받아들인다. 어려움에 처한 욥에게 헛똑똑이 친구들이 찾아와서 신학적 충고를 한다. 친구들이 갖고 있는 신학이란 게 지금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인과응보에 기반한 논리였다. 전에 어느 집사들이 나눈 대화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 예수를 믿는데 왜 강도를 만나?" / "예수 헛 믿은 거지 뭐…." / "그러게 말이야, 아 예수를 믿는데 왜 강도를 만나냐고?") 이 한국 신자들의 생각과 똑같은 논변을 욥의 친구가 펼친다. 예를 들어 한 친구의 말은 다음과 같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욥기 4:7-8, 표준새번역)
그러니까 니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필시 무슨 잘못을 저지른 탓이므로 그에 대해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로 믿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욥은 한사코 그런 주장을 거부한다. 자신의 의로움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다소 장황하게 논변이 이어지는데, 결론적으로 욥은 결국 하느님과 대면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게 된다. 잘 나가고 못 나감을 하느님의 뜻과 바로 관련시키는 천박한 논리는 지적 교만으로 판명난다. 해방신학자로 유명한 구띠에레스는 이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과응보—현세적 인과응보만이 아닌—의 세계는 하느님이 거처하시지 않는 세계이다. 그곳은 기껏해야 하느님이 방문하시는 정도의 세계이다. 주님은 “내게 주면 네게 주겠다”는 사고방식에 얽매인 분이 아니다. 모든 것, 인간의 모든 사업은 제아무리 가치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은총을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할 수 없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은총은 이미 은총이 아니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욥기가 제시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구띠에레스, <<욥에 관하여>>, 211-212쪽.)
욥기는 이런 심오한 주제를 문학의 형식에 담아놓은 아름다운 글이다. 이 글을 한국의 신자들이 읽는다면 현세적 축복을 강조하는 경향은 사라지지 않을까? 아, 그러나 그건 꽤나 달콤한 생각이다.
옛날에 우연히 어느 보수적인 신자와 욥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가 욥기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지목한 것은 욥기의 가장 마지막 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면 후 하느님은 욥의 고난에서 회복시켜 준다. 그가 이전에 지녔던 것의 배로 되돌려준다.
주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주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욥기 42:10-13, 표준새번역)
그가 욥기로부터 얻은 교훈은 하느님은 믿는 자에게 두배의 축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죽인 새끼들까지 두 배로 많이 낳아서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아, 이보다 욥기의 주제에서 동떨어진 결론이 또 있을까? 핵심 주제는 완전히 흘려보내고 욥기를 완전히 인과응보 교리의 텍스트로 읽어내는 이 예상치 못한 독서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성서의 한글자 한글자를 소중히 하는 분께는 실례가 되지만) 욥기의 마지막 장은 맹장처럼 붙어있는 부분이다. 글 전체 주제와 상관 없을 뿐더러 방해가 되는 내용이다. 학자들은 이 부분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이 후대에 추가된 내용이라고 본다. 주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편집자가 이 부분을 덧붙여 개악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입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분이 문학적 형식 때문에 갖추어진 것으로 본다. 욥기는 액자구조이다. 처음에 사탄과 하느님의 내기, 그리고 마지막에 원상복구라는 설화를 액자로 하고 그 안에 신학적 사유를 담은 작품이다. 그래서 서론과 결론 부분은 본문과는 다른 서술적 형태를 띄고 있다. 이야기 마지막에 원상복구가 되는 문학 구조는 고대 서남아시아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것이다. 유명한 예로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있다. 그러므로 결론의 내용은 “그는 행복하게 잘 살다 죽었답니다”라는 이야기 형식이지 주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 마지막 부분의 축복이 욥기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사실들로 신자들을 설복시킬 재주가 있다면 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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