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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그중에 으뜸은 사랑이라

by 방가房家 2023. 5. 28.

오늘은 아름다운 성경 구절을 놓고 이야기해 보련다.

바울이 고린토인에게 보낸 서한은 주로 여러가지 복잡한 교회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시시콜콜한 여러 논변들을 펼치다가 바울은 갑자기 눈에 띄는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하나 선보인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겸손한 운을 떼고 바울이 들려주는 사랑 노래의 내용은 누구에게도 익숙할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표준새번역개정판)


이 구절에 얽힌 종교사 몇 가지.

1. 잘 알다시피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테제는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였다. 종교개혁 이후 수백년간 이 테제를 놓고 개신교 신학자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는 격렬한 신학 논쟁이 오가게 된다. 개신교 신학자는 오직 믿음(faith)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믿음(faith)과 행함(work)의 병행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서 가톨릭 신학자들은 위의 고린도전서 구절을 즐겨 인용하였다. 이런 식이었다. “루터 니가 믿음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우기는데, 이것 봐라.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고. 믿음이 아니란 말이다.” 진지한 신학 논쟁이 가끔 이렇게 치사해 보일 때가 있다.

2. 현대 영어 성경에서 사랑은 물론 “love”이지만, 1611년에 번역되어 수백년간 영미 기독교의 근간이 되었던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charity”라는 단어로 옮기고 있다. “charity”라면 박애나 자애 정도의 의미가 떠오르는 낯선 단어이다. 사전에는 자비라는 뜻도 있으니 한국사람 같으면 불교 교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는 '고상한 사랑'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 그리스어 아가페의 번역으로 “charity”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성적인 의미에서의 사랑까지 포괄되는 "love"를 쓰기 껄끄러워서였다. 이 구절이 낭만적 사랑과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좀더 추상적인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 이 선택은 그 이전의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the Vulgate)의 번역을 반영한 것이다. 불가타에서는 아가페의 번역으로, 성적인 사랑을 포괄하는 아모르(amor) 대신에 고상한 단어 카리타스(caritas)를 택하였다.
이후의 영어의 역사에서 "love"는 점점 포괄적인 단어가 되어갔고, 성서 번역에서도 점차 "charity" 대신에 "love"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http://www.etymonline.com/index.php?search=charity&searchmode=none 참조) 우리는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번역을 갖고 있었다. 만약 박애와 같은 좀더 고상한 단어가 쓰였다면, 이 구절은 지금처럼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애들의 책갈피나 연애 편지에 인용되는 사랑 노래 대신에, 그저 성서 안의 한 구절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3. 킹 제임스 성경 얘기가 나온 김에 트집 잡고 싶은 부분이 있다. 미국 사람 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이 진정한 번역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개역성경이 진짜 성경이라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생각하듯이, 미국 사람들도 옛날부터 내려와 익숙한 이 성경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현대 번역들을 배척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이 강화되면 킹 제임스 성경으로 영어 번역이 이루어질 때 성령이 강림했으리라는, 변형된 축자영감설이 제시된다.

그건 그렇다 치자.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킹 제임스 성경이 진실한 성경이라고 믿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몇 무리가 있는데, 말씀보존학회(
http://biblemaster.co.kr)가 대표적이다. 미국인들의 신앙을 수입해서 형성된 것이 우리의 신앙이긴 하지만, 이 경우는 가장 수입하기 힘든 부분마저도 수입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 신자들이 중세 영어에 가까운 이 성경을 영어 원본으로 신앙할 수는 없고, 한글로 번역된 킹 제임스 성경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어 종의 “한글판” 킹 제임스 성경이 나와 있다. 그 책의 선전 문구를 인용해 본다.


▶우리말로 번역된 가장 정확하고 권위있는 성경, 한글킹제임스성경
1. 우리말로 번역된 가장 "정확"하고 "권위"있는 성경입니다
2. 바른 원문을 기조로 하여 정확하고 읽기 쉽게 번역되었으며,'없음'이란 구절이 없습니다.
3. 종교 개혁과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 성경입니다.
4. 개역성경에서 발견되는 원문상의 오류 3만 군데를 바로잡아 놓은 성경입니다.

"한글로 번역된 진짜 영어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한글 번역에 이견이 생겨 다른 한글 번역 킹 제임스 성경이 “한글 흠정역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번에는 킹 제임스 성경 침례교회라는 다른 그룹의 입장을 들어 보자.
영어 킹 제임스 성경만이 최종 권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그들의 고유 언어로 최종 권위가 되는 완벽한 성경을 주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중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을 염두에 두신 적이 없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바울은 자신의 친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서신을 각 민족의 언어로 번역하라고 부탁하거나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그들의 고유 언어로 완벽한 성경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라면, 최소한 성경에서 그 일에 대한 규정이나 자격 요건 등이 언급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독의 직분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으로 있어도, 어떤 사람이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는 규정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상에 단 하나의 언어로 하나의 성경만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 민족들은 그 절대 기준이 되는 완벽한 성경에 맞추어서 신앙 생활을 하면 됩니다.
논리를 찾기 힘든 주장이다. 다만 하느님이 성경을 주신 “지구상의 단 하나의 언어”가 영어라는 강한 확신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주장에 관심이 있다면, http://moogi.new21.org/think.htm을 참조할 것. 자기 주장을 잘 정리한 글이다.)

4. 이야기가 많이 샜는데, 내가 궁금했던 것은 킹 제임스 성경의 "charity"가 한글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어떻게 처리되었느냐는 것이다. 찾아본 결과, 싱겁지만 이 단어는 “사랑”이라고 번역되었다. 물론 이것은 제대로 된 번역이다. 앞에서 본대로 영어에서 "charity"와 "love"의 문제는 영어의 역사와 관련된 문제이고, 이 점을 고려해서 우리의 맥락에서 옮긴다면 자비나 자애가 아니라 마땅히 사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무리한 신앙의 전제 때문에, 제대로 “번역”했다는 사실 마저 트집의 대상이 된다. 번역자들끼리 어떠한 내부적 논의를 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영어의 "charity"와 "love"의 문자적 차이는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언어의 역사성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작업이다. 영어의 "love"와 "charity"의 역사에 대한 고려, 언어의 의미 변화를 고려해서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어떤 믿음의 맥락에서는 당연하지 않기도 하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절대적으로 주어진 (영어) 성경이라는 그들의 신앙 전제와 배치된다는 역설이,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의 “사랑”이라는 올바른 번역 안에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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