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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삶을 문자화한다는 것

by 방가房家 2023. 5. 31.

“삶을 문자화 한다는 것, 그것은 문화적인 폭력일 수 있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주제가 요즘 학계에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의식 중 하나인 것 같다.


아사드(Talal Asad)의 <<종교의 계보학>>(The Genealogies of religion) 5장은 번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국 인류학자들의 글을 분석하면서, 그는 인류학자들, 특히 상징을 다루는 학자들의 작업에는 “상징은 언어적 의미로 완전히 이해가능하며, 따라서 우리의 언어로 번역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얼핏 보면 당연하게 보이는 전제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상징 체계, “상징들이 의미하는 바”를 캐내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번역이라는 것, 일종의 문화적 호완성을 만드는 것이다. 번역은 저쪽에는 있지도 않은 무엇인가를 있다고 덮어씌워서 이쪽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번역은 양쪽이 평등할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양쪽의 권력이 비대칭일 때의 번역, 문화적 종속이며, 번역이라는 문화적 포맷이 강요되는 경우, 그 종속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아사드의 글이 좀 혼란스럽고 시론적 성격이 강해서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난 그런 주장을 어렵게나마 그의 글에서 읽어내었다.

남미 탈식민주의 연구의 아버지 미뇰로(Mignolo)의 <<르네상스의 이면>>(The darker side of Renaissance)의 1장은 그러한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는 일단 서구의 문화가 철저한 책의 문화임을 역사적으로 논증한다. 그 후 그 책의 문화가 남미 식민화 과정에서 비문자 문화에 어떤 식으로 강요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아메리카인들은 자신들의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인들의 새끼꼬기(knot)라든지 아즈텍인들의 상징적인 그림 문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호체계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책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번역은 기호(semiology) 대 기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명화라는 미명으로 그들에게 없는 알파벳 문자 체계를 생성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토착 기호 체계의 말살이었던 것이다.

 
길(Sam Gill)의 <<북미원주민의 종교생활>>(The Religious life of Native Americans)에서 만난 한 이야기에는, 이 주제와 관련된 면도,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인류학자가 낯선 문명에 들어가 무엇의 “이유,” “의미”를 묻고 그 답변을 거부당하는 모습이, 나에겐 타인의 삶을 텍스트화하는 시도로 읽혔다. 에스키모인들이 살아가는 비문자 문화권의 실존에서는 “물음”이 아니었던 것들이, 백인 서생에게는 답을 얻어 기록하고 싶은 물음이었다. 그런 “엉뚱한 물음”이 대답을 얻을 수도 얻지 못했을수도 있다. 대답을 얻었더라도, 억지로 얻어내었을 공산이 크다.
그 에피소드를 간단히 여기 번역해 놓는다.


 
라스무센이라는 학자가 1920년대 에스키모 인을 연구하다가 겪은 일. 사람들에게 왜 이런 것을 하며 저런 것을 하지 않는지 이유를 물을 때마다, 그는 그런 질문들이 그들에게 의미가 없거나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일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계속 물었다. 끝내는, 에스키모 인들의 대변인 아우아가 그를 거센 바람이 눈을 후려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얼어붙은 땅을 가리키며 라스무센에게 말했다.
사냥을 잘 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인간은 온화한 기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 자기와 가족을 위해 음식을 찾아야 하는 인간에게 끊임없는 강풍과 온갖 쓸 데 없는 고난이 있는 거죠? 왜죠? 왜죠?

라스무센이 답하지 못하자, 그는 그를 근처 집으로 데려갔다. 아우아는 가죽 깔개 아래 모여 떨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다시 아우아는 라스무센에게 말하였다.
왜 여기 추위와 불안이 있는 거죠? 구글로는 하루 종일 사냥하러 나갔고, 만약 그가 물개를 잡아온다면, 아내는 내일을 위한 기름 걱정 없이 불을 환히 켜고 웃을 것입니다. 이 곳은 따스하고 밝고 즐거워지고, 아이들은 깔개 밖으로 나와 삶을 즐기겠죠. 왜 그렇지 않은 거죠? 왜죠?

또다시 라스무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우아는 다시 그를 다른 집으로 데려 갔다. 이 집은, 병을 앓고 있는 그의 누이 낫세크의 집이었다. 그는 말하였다.
왜 사람들은 아프고 고통을 받는거죠? 우리는 모두 병을 두려워합니다. 여기 늙은 나의 누이가 있죠. 우리가 아는 한, 그녀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오래 살아오면서 건강한 아이들을 낳았고, 이제 병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합니다. 왜죠?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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