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의 노래 중에 "덩크 슛"이란 게 있다. "덩크슛 한 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이승환처럼 키가 작은 한 소년이 덩크슛 해봤으면 하는 소망을 말하는 것이 노래의 내용이다. 그리고 노래의 말미에서 덩크슛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지만, 들릴 듯 말듯한 라디오 중계 방송 소리로 슛 장면이 중계된다.
그것은 한 현대 도시인의 꿈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하나의 "기적" 이라고 표현한다면 깜찍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소망의 이루어짐을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수사법을 넘어서는 경우를 우리는 종교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흔히 기적은 초자연적인 신의 개입이라고 이야기된다. 예수의 부활에서 볼 수 있듯이 불가능함을 이루는 정도야 종교사에서 기적이라고 일컬어 질 만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사의 어떤 기적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소박한 것이어서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경우도 있다.
기적은 당대의 바램의 내용을 담는다. 당대의 삶의 현실이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면, 그 바램도 소박해질 수밖에 없으며, 기적 역시 앙증맞아지게 된다. 얼마전 중세 기독교사에서 그런 기적의 한 토막을 읽게 되었다.
(성녀 푸와의 기적 중에서) 기사 봉피스가 수도원에 가고 있었는데, 그의 노새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피를 흘리며 갑자기 죽었다. 그는 성소에 가서 엎드려 기도를 드렸으며, 마지막으로 노새의 죽음을 한탄하였다. 왜냐하면 그 노새는 흔히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노새였기 때문이며, 하필이면 그가 경건한 일에 몰두하고 있을 떄 오만한 악마가 그에게 손실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그 노새는 활기차게 공중으로 뛰어올라서 언덕을 가로질러 왔던 길을 가로질러 성읍으로 뛰어들어갔다. (조르쥬 뒤비, <<천년>>, 112-3쪽.)
11세기 중세 유럽이라는 미약한 농업 사회에서 노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이 기적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 노새의 소생이 심금을 울리는 사건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야 이 기적은 성립된다. 그래서 당대의 저자는 "만물을 창조하신 자비로운 창조주께서 온갖 피조물을 돌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소박한 기적이요, 아름다운 신앙이다. 이처럼 기적은 당대의 바람에 상응하는 것이기에, 역으로 중세의 기적 이야기들은 당대의 심성사를 읽는 사료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슬몃 웃음짓게 하는 기적은 어디서든 찾아볼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베푼 기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첫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독에 가득 차 있던 맹물을 술로 변화시킨 기적이었다.
그것은 마리아의 술심부름에 발끈한 예수의 기적으로도, 술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애처로와서 행한 기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든 간에 인간적인 정이 듬뿍 느껴지며, 사람들의 작은 소망을 충족시킨 깜찍한 기적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한국의 종교에서 그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뭉클한 느낌을 주는 기적의 예를 알고 있다. 그것은 개항기 때의 종교 천재 강증산이 남긴 일화들이다.
"그 집 주인이 집에 쌀이 없으므로 밤중에 수수를 끊어다가 방에서 다듬잇돌에 떨어서 수수망세기를 만들어 얼리니라. 다음날 아침에 호연이 '쌀이 없나 봐요, 다른 데로 가요.'하니, 상제님께서 세수를 하신 후에 마당 한가운데 서시어 허공을 향해 무어라 말씀을 하시니 잠수 후에 어떤 사람이 쌀 한 가마니를 지고 들어오더라. 상제님쎄서 주인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밤에 밭에 가서 수수를 끊어다가 수수망세기 해 준 정성으로 내가 그냥 갈 수 없어 쌀 한가마니를 주는 것이니 그런 줄 알아라.'"([도전], 도문편 31-2장)
"하루는 들에서 여러 농부들이 한가로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기쁘게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세상 인심이 종잇장처럼 각박하거늘 농부들에게 덕스런 말이 많도다' 하시니라. 이 때에 마침 여러 노우들이 뙤악볕 아래서 술을 구하지 못해 갈증을 이기지 못하거늘 상제님께서 가엾게 여기시고 '빈 동이에 물을 길어 오너라'하시어 그 물을 '양껏 마셔라' 하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술맛이 어떠하냐' 하고 물으시니 농부들이 매우 기뻐하며 '맛 좋은 술을 이렇게 구할 수 있으면 어찌 술이 없다고 근심하겠습니까?'하고 대답하거늘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심히 즐거워하시니라." ([도전], 도문편 52장)
강증산에게는 민중들의 가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는 가난함 속에 있었으며 자신 역시 항상 가난했다. 그래서 그의 기적 역시 배고픈 민중을 달래주는 훈훈한 종류의 것이 눈에 많이 띈다. 쌀 한가니의 기적, 막걸리 한동이의 기적...
우리는 백년 전 우리의 가난을 어느 정도 안다. 그러기에 그 작은 기적들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천년 전의 팔레스타인, 천년 전의 서양, 백년 전의 우리나라. 그 삶 속의 작아 보이는 바램들은 종종 기적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그것들은 결코 초인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생활 속의 기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