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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복음주의 출판문화

by 방가房家 2023. 5. 30.

이전에 ‘기독교 서적’은 ‘기독교 서점’에 가야 살 수 있는 책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유통망이 개선되어 인터넷서점이나 대형서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이전엔 기독교계 학술 서적의 출판물의 질이 일반 서적에 비해 낮은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서회 등 몇몇 출판사를 빼면 심각한 직역과 오역이 가득한 책, 심지어는 교정도 제대로 안 본 책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했다. 이 역시 최근에 많이 개선되었다. 이젠 ‘기독교 서적’(번역서)이라고 해서 읽기 괴롭다는 편견은 없다.

여전히 일반 출판물과 ‘기독교 서적’을 구분지어 주는 것은 사용되는 어휘이다. 마침 마크 놀의 <<터닝 포인트>>(CUP, 2007)라는 교회사 책을 읽고 있어, 책에서 눈에 띄는 어휘들을 정리해본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이 책의 번역은 그리 나쁘지 않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서적’이라는 말 대신에 ‘복음주의 출판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여기엔 처음부터 가톨릭 서적이 배제되어 있고 또 모든 개신교 서적들이 이런 특성을 지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임의적인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 ‘복음주의 출판물’에 대비되는 범주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역사학계와 종교학계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출판사에서 제시한 표준을 학계가 따르는 경우도 많지만) 일반 출판사의 서적들이다.

1. 하느님/하나님

일반 출판물과 복음주의 출판물을 가름하는 가장 확실한 경계는 ‘하나님’의 사용이다. 이른바 ‘기독교 서적’에서는 그 분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으로 부르며, 반면에 일반 출판물에서는 하느님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런 표현이 껄끄러운 사람들은 그냥 신神을 사용하지만, 나는 그런 관행에 찬성하지 않는다. 고유명사를 일반명사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따로 긴 논의가 필요하다.) 복음주의 출판물에서는 신부님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어색한 장면도 흔히 나타난다.
신학 관련 서적을 출판할 때 이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출판사 사장님께서는 이왕 신앙과 관련 있는 책이니 기독교 서점에 깔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즉 ‘하느님’은 기독교 서점에 깔릴 수 없다는 말.) 번역자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그래서 그대로 하느님으로 출판되었다. 사장님께는 좀 미안하기도 하다. 복음주의 출판물은 출판 시장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영역의 게토화라는 역설을 낳는다.
 
2. 성경 사용
위의 사안과 관련된 내용으로, 사용하는 성경의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 출판물에서는 개신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성경을 사용한다. 일반 출판물, 특히 학술서에서는 개역개정판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현대어로 되어있고 학술적인 성과가 반영된 표준새번역개정판(새번역)이나 번역이 유려한 공동번역이 선호된다. 가톨릭 출판사에서는 물론 공동번역을 사용하며 최근의 200주년 번역이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복음주의 출판물에선 신앙생활이 반영된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와 가톨릭을 다 고려해야 하는 일반 서적에선 선택이 좀 복잡한데, 성경 선택에서는 새번역과 공동번역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도 성경 편명은 더 익숙한 개신교식(예를 들어 <마태오의 복음서>가 아니라 <마태복음>)을 사용하는 어정쩡함을 보인다.
 
3. 기독교/그리스도교,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개신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전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복음주의 출판물에서는 개신교라는 이름이 불가피할 때에도 ‘개신교’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대신 프로테스탄티즘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일반 출판물에서는 ‘기독교=개신교’라는 우리나라 대중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나는 여전히 기독교를 고집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런 경향을 반영해서인지 <<터닝 포인트>>에서는 기독교인 대신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한테는 낯설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참고로 최근의 복음주의 출판물에서 천주교를 카톨릭, 캐톨릭 등으로 부르는 비매너성 플레이는 거의 없어졌다. 천주교회가 자신을 부르는 이름인 ‘가톨릭’으로 제대로 불러준다는 것.
 
4. 오리겐, 유세비우스, 콘스탄틴...
고대와 중세 유럽의 인명을 우리말로 표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고 그에 대한 합의도 비교적 최근에야 정리되는 모습이다. 대략 이야기하면 일반 학계의 원칙은 그 인물이 활동한 나라에서 불리는 이름을 따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복음주의 출판물의 표기 원칙은 “미국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이다.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읽는 것이 신학계의 관행이고 이것이 출판물에 반영되어 있다. 일반 출판물에서는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오스, 콘스탄티누스 등으로 표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5. 캐더린/카타리나/가타리나,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노, 프란시스/프란체스코/프란치스꼬(코)...
성인 명칭의 경우엔 가톨릭 신앙의 맥락에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기에 사정이 더 복잡하다. 복음주의 출판물에서는 철저히 미국식으로 읽는다. 일반 서적에서는 출신국가를 따져서 부른다. 그런데 일반 서적의 명칭이 가톨릭 성인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하비에르, 그 이름) 일반 서적의 명칭은 개신교식과 가톨릭식의 가운데 있지만 가톨릭식에 더 가깝다.
시에나의 성녀 "Catherine"을 캐더린으로 표기한 것은 거의 무식(아니면 무시)의 소산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런 미국식 표기가 계속된다. 그것은 이 책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출판물에 만연된 관습이다. 학술적으로는 카타리나가 무난하다고 생각되는데(이렇게 말하는 것은 확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어머니의 본명은 ‘가타리나’이다. 
어거스틴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립은 팽팽하다. 해결될 기미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책 본문에서는 어거스틴인데 역자 약력을 보니 <<아우구스티누스>>(민음사)가 있다. 역시 어디서 출판했느냐가 관건임을 볼 수 있다. 
프란시스의 경우에는 프란체스코로 쓰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가톨릭 신앙 내의 이름이 다르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명칭 정리가 용이하지 않다. 어찌되었건 프란시스는 좀 아니다.
 
6. 칼(캘)빈/칼(깔)뱅
칼뱅은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인물이기에 논의하기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학술적으로 표기하면 활동지역(프랑스이기도 하고 스위스이기도 하지만)을 고려해 깔뱅이겠지만 최근 국어정책이 된소리를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칼뱅 정도가 아닐까 한다. 얼마 전에 “캘빈 길”을 만든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기사 참조: ‘칼빈 길’ 명예도로명 제정에 지역주민들 뜻 모아) 발상 자체도 문제이겠지만 이름이 칼빈인지 칼(깔)뱅인지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서적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반영된 책이다. 신앙생활의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표준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표준과 신앙언어가 충돌할 때 선택의 고민은 필요하다. 한국어 공동체의 합의와 조화를 이룰 것인가, 특정 신앙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남을 것이냐의 고민이 그것이다. 보편성을 주장하는 신앙이라면 그 고민은 더 깊어야 한다. 비유적으로 말해 사투리,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해당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은어隱語를 전사회적으로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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