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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라디오 신부님, Charles Coughlin

by 방가房家 2023. 5. 29.

라디오 신부님이라고 하면 다정한 어감이 들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Radio Priest"는 미국의 유명한 대중선동가(demagouge)이자 꼴통 보수 신부 카글린(Charles E. Coughlin)의 별명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에 주로 유명세를 탔다. 그는 당시 중요한 대중 매체였던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많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매주 4천만명의 미국인들이 카글린 신부의 설교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가톨릭 교인들만이 아니라 개신교인들 역시 그의 팬이었다. 그의 강연 내용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미국사회가 극도로 암울하던 시기였다. 카글린 신부는 “사회 정의”를 외치며 불만에 가득찬 대중들의 정서를 자극하였는데, 이 때 그가 외친 사회 정의라든지 민주주의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과 다소 달랐다. 그는 사회적 불만을 쏟아부을 적을 설정하는데 능했다. 우선 그가 공격한 미국 사회의 적은 공산주의였다. (이것은 미국인의 공산주의 개념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그가 공산주의로 공격한 것은 소련뿐만 아니라,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하던 뉴딜 정책도 포함되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당시 민주당 정책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자본주의의 옹호자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은행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지독한 반유대주의가 결부되어 있다. 그는 은행은 미국인의 돈을 앗아가려는 유대인의 음모라고 주장하였다. 미국을 멸망시키려는 유대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소리높여 주장하였다. 사유재산보다는 부의 적절한 분배를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공산주의보다는 농업에 기반한 이전의 사회 체계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가깝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 이것은 원래의 미국 보수층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점점 반유대주의를 외치던 카글린에게는 나치즘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미국 내 독일계 친나치 집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사실 미국에서 원래 반나치주의 정서가 그리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연합군에 참전하게 됨으로써 주류사회에 크나큰 변화를 맞이한 것이었다. 미국은 유대인의 비난자에서 유대인의 보호자로 바뀌었다. 반유대주의의 목소리로 잦아들 수밖에 었었다. 카글린의 영향력이 극도로 약해진 것은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여한 그 배경에서였다. 그는 더욱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지만, 그의 주장은 히틀러와 유사한 것으로 풍자되기나 했지,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라디오를 그만두고 쓸쓸히 자기 교구에 돌아갔다.
이 특이한 신부에 대해서 종교보다는 미국 정치사와 매스미디어의 측면에서 논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추종자는 가톨릭을 넘어 많은 개신교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논할 부분이 있다. 이상하게 들리는 카글린 신부의 사회상은, 사실은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가톨릭은 꼴보수집단이었다. 19세기 말 가톨릭의 정통교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 위협으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 무렵 교황청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를 열어 이 보수적 태도를 천명하고, 거기에다가 교황 무오류설이라는 자뻑성 교리를 만든다. 이 교리는 요즘 잘 이야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가톨릭의 앞날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 내용으로 작용했다. 그랬던 가톨릭 분위기를 보면 카글린 신부의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당시 미국 가톨릭 주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교회를 만들어가려는 입장이었다. 민주당 정부의 태도를 지지하며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움직임을 보인 미국 주교들은, 당시 보수적인 교황청과 거리를 유지하면서까지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교회를 만들었다. (이 갈등 관계는 1960년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청이 대폭적으로 사회참여적인 태도를 천명하면서 해소된다.) 그런 점에서 카글린은 전통적이긴 했지만 미국 가톨릭의 흐름에 역행하는 인물이었다.
카글린 신부의 영향력은 거의 잊혀졌지만, 가톨릭 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그러니까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의 보수적인 가톨릭을 지키려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가톨릭 근본주의자(Catholic Fundamentalist)라고 불린다. 그들은 따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그들의 교회를 만드는 그 순간, 교황을 모시지 않는 그 순간 가톨릭이 아니게 되어버리므로, 그들이 독자적인 교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만들어 성공한 멜 깁슨이 이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의 종교적 태도가 영화에 어떻게 스며있는지를 판별하는 일은 미묘해서 쉽지 않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나오는 반유대주의가, 물론 이것이 기독교의 공통적인 태도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의 근본주의적 가톨릭 신앙과도 맞닿아 있다고 본다.

참고할만한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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