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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그의 죽음에 대한 다른 시선들

by 방가房家 2023. 5. 27.

개신교인들의 경우에는 김선일씨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일반 국민과 좀 다를 수 있는 것 같다. 다수의 신자들은 일반 국민과 별로 다르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어느 신자들은 김선일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 중점을 두어 생각하기도 한다. 한 대한민국 국민인 동시에 목사를 희망했던 독실한 개신교인의 죽음이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의미화가 뒤따르게 된다.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co.kr/)를 읽다가 이 죽음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읽게 되었다. 정제된 반응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반응들도 만나게 된다. 이 반응들을 통해서 한국 개신교회의 단면들이 드러나 보인다. 예를 들어, 어느 신자는 김선일씨의 빈소에 “제사상”이 차려진 것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독실한 신자인 김씨와는 달리, 집안 식구들은 제대로 된 개신교인이 아니지 않을까 안타까워 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기사(http://www.newsnjoy.co.kr/news/read.php?idxno=8227)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대목이 있었다.

오늘 모 교회에서 하는 북한선교 세미나에 갔다 왔다. 옆에 앉은 집사님들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 글쎄 아무개가 길 가다가 강도를 만났데!"
"아니, 그 사람 예수를 믿는데 왜 강도를 만나?"
"예수 헛 믿은 거지 뭐…."
"그러게 말이야, 아 예수를 믿는데 왜 강도를 만나냐고?"

김선일씨의 죽음을 두고 한 이야기다. 쉽게 말해 김선일씨가 변을 당한 것은 예수를 헛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화는 성찰을 거치지 않은 것이고, 생각 없는 아이들의 수준의 대화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고에 한국 교회의 신앙의 중요한 회로 중 하나가 내장되어 있다. 하느님은 신앙이 좋은 자에게 복을 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 시련을 준다는... 신학 용어로 신명기적 사관이라고 부르는 이 편리한 태도는 이미 구약 성서 내에서 극복이 된 사고방식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창세기의 번성하라는 축복에 관련된 부분만 읽고 뒷부분의 욥기과 같은 수준 높은 신학적 성찰은 읽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의 고통의 의미가 어찌 선악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으리요? 주변에서 무수한 반증들을 만날 터인데도 불구하고, 신앙 좋으면 그저 좋아진다는 단순한 신학이 유지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다.

김선일씨는 확실히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 부산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외대에 편입해서는 선교를 염두에 두고 아랍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가 이라크에서 일한 것도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선교의 예비 과정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정치적인 정황에서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려는 유혹이 개신교인들에게 있는 것 같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를 했고, 하고 있다. 그 기도의 상당수가 그의 죽음을 선교와 연결지어 이루어진 것 같다. “죽음을 ‘순교’로 왜곡하는 ‘선교지상주의’”라는 적절한 제목의 기사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http://www.newsnjoy.co.kr/news/read.php?idxno=8268) 이 기사는 한 목사의 기도문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 재인용해 본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사랑하는 종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죽음이요, 이라크의 문을 열게 하는 죽음이요. 그가 평소에 기도했던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역사를 바꾸는 죽음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이 참수를 당할 때 계속 기도하던 모습을 우리는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이 아들이 지금 하나님 나라 우편에서 스데반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주님과의 만남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남아있는 유족들, 특별히 형제의 아버지, 어머니를 위로해 주시고, 슬퍼하는 온 국민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더욱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영적전쟁의 프런티어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그런 일이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김선일씨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기도이지만, 그것이 선교에 대한 교회의 관심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큰 인식의 차이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은 과연 이슬람 문화의 문을 열기 위함인가? 그러한 인식은 김선일씨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일반적 인식과 많이 배치된다. 교회의 입장에서 선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자유인가? 물론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의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목사의 기도문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 국민들이 어떤 경우에도 테러에 굴복하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어떤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아름다운 놀라운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 과연 이슬람 문화권에 기독교를 심기 위한 것인지, 그것이 평화를 향한 길인지, 물론 동의할 수 없는 기도문이다. 이 기사의 논조는 목사의 기도문을 비판하는 것이었고 내가 보기엔 상당히 이성적이었는데, 이에 대한 독자들의 거부 반응들이 의외로 거세었다. 열 몇 편의 글들 중 3분의 2 정도는 기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중 어조가 좀 강경한 두 개의 글을 인용해 놓는다. 다음 글들이 한국 교회의 평균적인 인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는 이미 부산신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군목으로 제대한 사람이며, 중동선교의 꿈을 실현하는 첫 단계로서 이라크에서 일하고 있었던 전도사요 (군목제대라면 사실 목사요). 그가 다시 외대 아랍어과에 입학했던 이유도 중동선교를 위한 것이었고, 독실한 기독교 여성인 이라크 여인과 현지 결혼하려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요. 아직 교회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선교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지 않소. 그걸 꼭 미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해야 당신 속이 후련한 거요... 비록 정식 선교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죽긴 했지만, 앞으로 선교의 문이 열려 그의 중동선교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교회의 바람이 당신 눈에 뭐가 그리 아니꼬운 거요.
당신 머리 속에 든건 결국 구닥다리 이념아니요. 미국이 싫은 것 아니요.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던 그것과 연관시키는 외통수 신념아니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고, 그걸 하기 위해 건수만 만나면 억지로 연관시키고 짖어대는 천박한 지성주의, 그것 외에 당신 말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 있소.

한국 교회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말투가 굉장히 화가 납니다... 고 김선일씨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그 목사님의 신앙입니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매도되고 욕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저는 고 김선일씨의 죽음을 그 목사님이 이용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분이 행하였던 귀한 사역을 소개하고, 그 분이 얼마나 귀한 삶을 살다 갔는지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교회를 비판하되,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하시면 어떨른지요.
마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를 보듯이, 날카로운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듯이 하지 말고 말이지요.

왜 신앙에 있어서 지적인 인식은 오만으로 정죄당하는가? 과연 신앙은 가슴으로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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