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7-18)
1908년 미국 테네시 주의 한 교회, 마가복음 16장에 대한 헨슬리 목사의 설교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한 상자의 방울뱀 무리가 그의 앞에 쏟아졌다. 손으로 뱀을 집어든다는 그 구절의 문자적 진실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날의 인상적인 설교 이후, 구원을 얻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설교와 집회에서 독사를 사용하는 행위는 하나의 독특한 종교 의례로 정착하기 시작한다. 목사와 신자들은 집회 중에 독사를 손으로 집어 올리며 자신의 믿음의 결과를 과시하였다. 이런 행위를 하는 교회들을 “스네이크 핸들러”(Snake Handler)라고 부른다. 필경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없는 이름일 것이다. 뱀꾼 교회라고 부르고도 싶지만, 이름을 번역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인지라 일단 유보한다.
1920년대부터 미국 동남부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산간 교회에 이 종교 행위가 유행하였다. 테네시 주, 조지아 주, 켄터키 주, 노스 캐롤나이나 주, 웨스트 버지니아 주 등에 약간의 교회들이 남아 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2천 명 정도의 신자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뱀에 목사들이 물려 죽는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몇몇 주에서 이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지만, 그것은 또한 교회 내부적 관점에서는 탄압과 순교로 이해되어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 종파는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낳은 많은 기독교의 변형태 중의 하나이다. 성서가 문자적으로 진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뱀에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성서에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웃고 지나갈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한다. 믿음에 대한 시험을 앞에 놓고, 결국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뱀에 물려 죽는다면? 그것은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것을 “순수한” 신앙이라 부를 수 있다. 그 순수함은, 위험하다.
성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구절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의 마가복음 구절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복음서 사본들에서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난다.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여자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는 게 이 복음서의 끝이다. 후에 이 복음서가 편집되어 예수가 부활하여 나타나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하고, 믿는 자에게 이러이러한 표징이 나타난다는 말을 했다는 부분이 첨가되었다. 뱀에 물려도 상관없다는 이 만용스러운 내용은, 첨가된 이 부분에만 나오고 신약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
문자주의는 위험하다. 보통 그것은 맥락과 상관없이 부분적인 구절을 따서 받아들이는 선택적인 문자주의로 나타나기에 더욱 위험하다. 선택적 문자주의를 따를 때, 성서를 이용해 할 수 있는 짓거리의 경우의 숫자는, 계산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무한하다.
뱀에 물려 죽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 실천 논리의 귀결이며, 그것을 실천할 정도로 그들에게 용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신앙의 내적 완결성으로 볼 때는 아무 하자가 없는 일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는 선택적 문자주의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그 사람들도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항상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광신은 아름다운 신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항상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광신은 아름다운 신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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