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미국에서 백인들이 아메리카 토박이들에게 선교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흔히 미국 인디언 선교 과정은 “문명화”로 요약되어 설명된다. 서구 성적 윤리의 주입은 그 문명화의 일환이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이들에게 백인의 성적 윤리를 강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별 탈 없던 삶이 사실은 악에 가득찬 삶이었다는 인식을 갖게 하고 죄를 고백하도록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주목해야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시민법에 의해서 일부다처, 혼인한 사람들의 간음, 독신자의 간통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이 중에서 독신자의 간통 문제가 지역 토착 문화의 가장 거센 저항을 받았다. 뉴 잉글랜드 정착자들(다시 말해, 백인)은 (원주민들의) 혼외 정사 뿐만 아니라 은폐되지 않은 성 행위에 대해서도 불쾌해 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있도록, 그리고 아이와 하인들도 자신의 공간을 할당받도록 구획된--이전에 그들은 사적인 것이라곤 없어서 대낮에도, 다른 사람에게도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에-- 큰 거주 공간”을 짓도록 원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결정적으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 충성을 바치는 추장들을 위한 교리문답 시험은, 원주민 지도자들에게 유럽의 성적인 죄악들, 이를테면 “간통, 간음, 근친상간, 강간, 남색, 수간” 등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설명해 놓고, 그들로 하여금 “더러운 욕정을 범하지 말 것”을 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토착 문화에 대한 윌리엄스의 묘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개념들 대다수가 토착 아메리카인들에게는 새로운 것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Ann Taves, "Sexuality in American Religious History," Retelling US Religious History, p.37.)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덕, 다른 말로 해서 새로운 죄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복음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복음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할 때, 복음을 통해 사함을 받는 그 죄는 문화적인 범주이다.(기독교인들이 죄악시하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상대적인 범주이다.)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대목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심어야 한다. 서양 사람들이 느끼는 성적 죄의식이 아메리카 토박이들에게 전이되지 않는 한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미개한 인디언”의 입에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 나오는 순간에서야, 그는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그가 고백하는 죄로 물든 과거는 아메리카 토착 문화에서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의 공통적인 구조이다. 이른바 “병 주고 약 주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선교 당해본 경험을 떠올리면 그 구조가 보일 것이다. 당신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세상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 순행하고 있고 당신은 그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는 해피 보이라면, 선교의 대화는 시작될 수 없다. 선교의 시작은 언제나 “당신이 죄인임”을 일깨우는데서 시작한다. “당신, 비교적 착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잘못한 것이 하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냐?” “속으로는 음흉한 생각하는 게 인간 본성 아냐?” 이런 공격을 던지다 보통 결정타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혹은 그 변형으로,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답은 이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오.”
선교 지침서의 첫 페이지에는 항상 죄인인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절대적인 거리를 묘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그림은 대화의 시작이 아니라 대화의 종결이다. 그것은 복음이 필요로 하는 죄의식이 대화에서 전제되는데 성공하였음을 묘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의 공통적인 구조이다. 이른바 “병 주고 약 주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선교 당해본 경험을 떠올리면 그 구조가 보일 것이다. 당신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세상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 순행하고 있고 당신은 그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는 해피 보이라면, 선교의 대화는 시작될 수 없다. 선교의 시작은 언제나 “당신이 죄인임”을 일깨우는데서 시작한다. “당신, 비교적 착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잘못한 것이 하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냐?” “속으로는 음흉한 생각하는 게 인간 본성 아냐?” 이런 공격을 던지다 보통 결정타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혹은 그 변형으로,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답은 이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오.”
이 초반 대화가 사실 선교의 모든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통절한다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기에. 하지만 선교사가 말하는 “죄”라는 게 여전히 외계어처럼 들려 알아먹을 수가 없다면, 그 대화에는 진전이 없다. 정리하자면, 선교의 성패를 결정짓는 이 첫 단계는 죄의 문화적 범주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이다.
선교 지침서의 첫 페이지에는 항상 죄인인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절대적인 거리를 묘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그림은 대화의 시작이 아니라 대화의 종결이다. 그것은 복음이 필요로 하는 죄의식이 대화에서 전제되는데 성공하였음을 묘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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