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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성서로 노예제 정당화하기

by 방가房家 2023. 5. 26.

성서가 악용된 사례는 무수하게 많다. 성서는 사실 워낙 다양한 목소리들을 담고 있는 텍스트인데, 다수의 사람들은 단일한 목소리를 갖는다고 믿고 있는 텍스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성서보다 좋은 재료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 맘 먹고 이용해 먹으려 든다면 어떤 주장에든 사용될 수 있는 게 성서이다. 사실 그 짓이 수천년 동안 글 꽤나 하는 종교인들이 해온 것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노예 제도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성서는 양편에서 모두 널리 인용되었다. 이 중에서 남부의 목사님들이 사용한 성서 구절들을 살펴보자. 사실 성서에서 노예제를 옹호하기 위해 인용될 수 있는 부분은 지천으로 깔렸다. 유명한 몇 개 사례를 보자.

1.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는 게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이걸 노예제에 적용시키면, 노예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니까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업자득이란 거다. 우리에게는 논어의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식으로 들릴 법한 이야기가, 기묘하게도 보수적인 논리로 변형되었다.

2. 반면 성서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는 유명한 구절이 갈라디아서에 나온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이 부분에 대해서 남부 백인들은 방어 논리를 개발해 놓았다. 그 구절이 사회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일치감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이런 식의 논리(사실은 윽박지르기)를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남자가 여자되는 거냐? 다른 건 다른 거 아니냐?”

3. 무엇보다도, 가정 규례, 혹은 가정 생활 지침이라고 알려진 구절들이 노예제 옹호의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4개의 제2 바울 서신(The Deutero-Pauline Letters; 바울의 이름으로 지어졌지만 바울 후대의 서신으로 추정되는 문헌을 말함)에서 나타나는 이 지침에는 사회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한 군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입니다.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된 이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종으로 있는 이 여러분,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골 3:18-4:1)
이것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구절이고, 이에 대한 연구들도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더 이상은 생략. 사실 이 부분은 나도 공부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도 참 잘 맞는 구절인 것 같다.

4. 구약 성서에서는 창세기 9:20-27이 악명 높은 구절이다. 노아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는 대목이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셈의 주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셈은 가나안을 종으로 부릴 것이다.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종으로 삼아서, 셈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
남부 백인들은 위의 구절을 “야벳=백인, 가나안=흑인, 셈=아메리카 토박이”로 해석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성서의 함은 흑인으로 해석되어 왔는데,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축복에 의해 백인(야벳)은 흑인(가나안)으 종으로 부리며 아메리카 토박이들(셈)의 삶의 터전을 정당하게 빼앗아 산다는 것이, 이 부분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었다.

주의 깊게 읽어본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건 19세기 미국 사회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자세히 뜯어보면 시대가 흘러도 보수주의자들의 논리 구조는 비슷하다. 위의 악용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식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비슷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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