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Christianity)라는 말은 세 전통을 아우르는 말이다. 개신교(Protestantism), 천주교(Catholicism), 그리고 정교회(Orthodox Church). 하지만 절대 다수의 한국어 용법에서 기독교는 그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무슨 종교 믿니?” / “기독교요.” “종교를 믿습니까?” / “기독교인이에요.” 이런 대화가 오고갔을 때,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개신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기독교 안에는 가톨릭이 포함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말을 개신교가 독점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어의 심각한 현실이다.
미국 이야기를 잠시 들먹여야겠다. 미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기독교의 한 교파(denomination)이다. (우리나라에선 이단으로 인식되는 몰몬 교회(Mormonism)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그래서 언어상으로 가톨릭이 “기독교” 바깥으로 퉁겨나가지 않는다. 교회(church)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인은 교회를 다니고, 가톨릭인은 성당을 다니지만, 미국에서는 모두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서만 유독 개신교와 가톨릭의 경계가 엄중한 것이다. 다른 여러 나라의 경우를 조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난 이런 언어적 구분은 한국 특유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난 한국 개신교의 “기독교” 독점이 비정상적인 용법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만한 용법이라고 생각한다.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면서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난 개신교인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개신교만이 진실한 기독교라는 전제를 은연중에, 혹은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더 나아가 “크리스챤”이라는 언어가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공동체 내적인 표현이다. 한국 개신교가 미국 교회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뉘앙스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아마 영어식 표기에 의해 진실성이라는 느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언어 독점 때문에, 학계나 가톨릭 쪽에 있는 사람들이 애를 많이 먹는다. 기독교세계를 아우르는 표현을 해야 할 때, “기독교”라는 말을 쓰면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고안해서 쓴다.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기독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한다. 동일한 의미이고, 동일한 말의 변형된 두 표기일 뿐인 두 단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궁금증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난 “그리스도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가톨릭 교인과 학자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독교라는 말이 제대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의 경우에,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칭하는 경우에는 기독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개신교회”라는 말이 적용되어야 할 때는 꼬박꼬박 그 말을 붙여주는 노력을 한다. (개신교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개신교인들도 꽤 된다. 하지만 그것은 앞서 말한 그들의 오만함의 일부이다.) 그게 참으로 상식적인 용법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나도 헛갈릴 때가 있으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게 얼마나 어려우랴.
언어는 권력이 투쟁하는 지점이다. 좀 살벌하게 들렸을지 몰라도, 말이란 게 절대 불변의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힘센 쪽의 이해를 반영한다는 것이, 요즘 학계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기독교”가 개신교회에 의해 독점되어 왔다는 것은, 해방 이후 남한사회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는 동안 개신교회가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이건 나의 가설이다. “기독교”라는 말의 역사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천주쟁이”와 “예수쟁이”라는 언어의 역사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 가톨릭이 “기독교” 안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또 그 질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파중 하나이다. 현재 한국 개신교인의 숫자는 천만 정도로 예상되고, 가톨릭 교인의 숫자는 4백만 정도로 예상된다. (개신교인의 숫자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정체 혹은 약간의 감소를 보인다. 반면에 가톨릭 교회는 꾸준한 성장률을 보였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그리고 가톨릭 특유의 위계적 구조로 인해, 교회의 조직력 측면에서 가톨릭 교회는 어느 개신교회보다도 막강한 결집력을 지닌다. 언어가 파워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기독교”라는 언어는 점점 가톨릭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역사 분야에서 기독교는 골치아픈 말이 되어 버린다. 잘 알고 있듯이, 로마에서 박해받다가 결국 국교로 공인받은 종교는 기독교이다. 중세 유럽을 지배한 종교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종교도, 갈릴레오를 윽박지른 종교도 기독교이다. 그런데 그 기독교는 우리 현실의 “기독교”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지는 얼마나 되었을까? 답은 200년 전이다. 천주교가 200년 전에, 개신교가 100년 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신교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개신교인의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개신교 선교로부터 잡아서 자신의 역사를 절반이나 잘라먹는 우를 범하는 교인을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모든 한국 기독교 역사책은 200년 전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책들에서는 재미있는 경향이 발견된다. 일단 천주교 선교와 조선의 천주교 박해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하는데(대부분 이 이야기가 1장을 이룬다),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많은 천주교 이야기는 쏙 사라진다. 개신교 입장에서 쓰여진 기독교 역사에서, 천주교가 처음에는 구색맞추기로 들어가긴 하지만, 본론에서는 두 교파를 “기독교”라는 하나의 범주에서 통합적으로 기술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직접적인 동기는, 요즘 미국에서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 띄우기가 한참인 것을 보고서이다. 가톨릭 교회만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열렬히 이 영화를 띄운다. 많은 교회들이 이 영화를 띄우고 그 여파를 교회를 떠난 신도들을 되찾는데 활용하는 현명함을 보여준다. 난 이 영화가 지독한 가톨릭 신자에 의해 제작된 것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피의 고통이라는 주제는 분명 중세 가톨릭 신앙의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고,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가톨릭 전통의 예수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해서 개신교인 입장에서는 구미에 좀 맞지 않거나,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난 아직 그런 점에 개의하는, 물론 영화의 잔인성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그것이 가톨릭 쪽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해서 이 영화를 문제삼는 개신교인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만든 영화이고, 기독교에 도움을 주는 영화이라는 점에는 이견을 달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에서는 가톨릭이 기독교의 하나(denomination)이다. 교파 간의 차이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에 한국의 가톨릭인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사태가 좀 달랐을 것 같다. 그것이 온 한국 기독교인의 공감대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았을 것이다. “기독교”라는 언어의 장난 때문이다. 자칭 “기독교인”들이 천주교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범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앞으로 멜 깁슨의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어 한국 기독교(개신교+천주교)인들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주의깊게 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싱거울 것이다. 내 예상을 미리 밝히자면, 이 영화는 지독한 천주쟁이 멜 깁슨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는 미국 개신교회의 지지를 이미 얻은 영화이고, 미국 교회의 절대적인 문화적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 교회가 괜한 딴지를 걸 리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