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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돌아다니다가

서양인이 구경한 용미리 석불

by 방가房家 2023. 5. 24.

19세기말 20세기초 서양인들이 한국에서 그들이 상상했던 ‘우상’을 보기 위해 많이 갔던 곳으로 보도각 백불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많지는 않지만 서양인들이 경기도 북부를 지나다가 파주의 용미리 석불에 대해 언급한 것들이 눈에 띈다. 이 거대한 석불이야말로 그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장관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찾아보면 더 있겠지만, 우선 최근에 눈에 띈 것은 두 개의 자료이다. 인용하기에 앞서 내가 본 용미리 석불입상(파주시 광탄면)의 모습.


 
 

하나는 선교사 게일의 1895년(글 쓴 시기는 1894년)의 언급. 고려조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전승을 소개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사실이 아니다. 고려 때의 조성 설화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서울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파주의 바위 위에 있는 미륵(석조 형상)을 보았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있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양(서울)의 뻗어 오르는 기운을 막아 송도를 보호하기 위해 지난 왕조[고려] 때 그곳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Gale, "Notes of Travels in Corea," in Christopher Thomas  Gardner (ed.), <<Corea>> (Brisbane: Australasian Association, The Advancement of Science, 1895), 28-29.
 
 
여행가 비숍 부인의 상세한 언급. 쌍미륵을 남녀의 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고양을 지난 곳에, 한국인이 자랑할 만한 몇 안 되는 유물 중 두 기가 솔숲 위로 가파른 벼랑의 측면에 한없는 위엄을 드러내며 서 있다. 이들은 35피트 높이의 거대한 흉상인 미륵(mirioks)으로,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이들은 한국 불교의 매우 이른 시기의, 사람들이 이처럼 고된 작업에 애쓸 정도로, 그리고 자연 속의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를 표현해낼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이었던 때의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나란히 서 있다. 한 분은 둥근 모자를, 다른 분은 네모난 모자를 썼다. 불교의 정적, 내 식으로 말한다면 무심함이 그들의 거대한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많은 변화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에 그들이 지켜보았던 것만큼 큰 변화는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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