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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묘, 신화와 역사

by 방가房家 2023. 5. 24.

종교학에서는 가끔 신화와 역사의 관계를 논하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 이 둘은 대립되는 것 같다. 신화는 허구이고 역사는 진실이라는 식으로.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금세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얼마나 많이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 신화는 또한 생각보다 많은 현실의 재료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 말을 역사가 허구라는 뜻으로 오해말기를 바란다. 역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요소가 개입한다는 말이다. 
역사와 신화의 대립이 그리 유용하지 않은 사례를 우리 동네에서 만나게 된다.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묘에 대한 공식적인 안내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희생된 70여 명 중 젊은 육신의 묘역이다.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의 사육신 묘비를 세우고 1978년 정화해 사육신공원을 조성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만 묻혔으나, 77∼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추봉(追封)하였다.
이 안내문은 사실을 말한다. 숙종 때 민절서원이 세워지고, 정조 때 신도비가 건립되고, 1978년 정부에서 사육신공원으로 조성한 것이 현재의 사육신묘를 있게 한 중요한 사건들이다. 공원 조성 때 4기의 무덤에 3기를 덧붙인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그러나 이 안내문에서 은근슬쩍 넘어간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것이 실제 사육신의 묘소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그러하다는 소문이 민간에서 전승되어 왔고, 그러한 믿음이 숙종 때 와서야 공식적으로 승인 받았다는 것이다. 안내문이 슬쩍 넘긴 부분에 대하여 내가 아끼는 책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말해준다.
“생각해보면 이들 사육신의 묘는 애당초 남기도 어려웠고, 한데 모이기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반죄로 죽임을 당한 그들의 시체를 감히 수습할 수도 없었거니와 일가친척까지 모두 풍비박산이 나 그럴만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세월이 흐르고 차츰 이들 사육신이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민간에서는 한강가 노량진 언덕에 있는 몇 기의 무덤을 사육신묘라고 하여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뜻을 기리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 그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그럴 듯한 얘기도 생겨난 것이리라.”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돌베개, 2004), 84.
핵심은 무덤이 허구라고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진위를 가리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핵심은 믿음이 어떠한 현실[실재]을 구성해내었다는 것이다. 사육신의 충절에 대한 믿음이 노량진 언덕의 어떤 자리의 존재를 가능케 했고, 그것이 이제는 의미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사육신묘는 소문이 만들어낸 진실이자 믿음이 빚어낸 현실이다. 이미 동작구의 브랜드 명은 “충효의 고장”이다. 이것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다.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 때 아무도 몰랐던 예수의 무덤자리인 성묘(Holy Sepulchre)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지었던 과정과도 마찬가지로(이에 대해서는 <<자리 잡기>> 4장을 볼 것. 성묘나 사육신묘나 정치적 권력이 작동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사육신묘 역시 믿음의 전승을 통하여 성스러운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묘의 모습들.
묘 앞의 사당. 
묘역에는 전망이 좋은 공원 부지가 조성되어 있다.
전망 좋은 곳으로 지정했지만 앞의 전망은 철조망의 방해를 받고 있다.

원래 2010년에 완공될 예정이었던 역사관은 아직 마무리 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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