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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구조주의적 사유

by 방가房家 2023. 5. 22.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는 통시언어학과 공시언어학을 구분하고 공시언어학을 강조하는 내용이 제시된다. 통시언어학의 의미가 없다고까지는 하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보다는 한 시점에서 본 구조적인 의미를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 책의 내용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소쉬르는 통시적인 것에 대한 공시적인 것의 우선성을 체스의 예를 들어 기가 막히게 설명한다.

[체스판의] 말 하나의 이동은 그 전의 균형과 그 후의 균형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현상이다. 일어난 변화는 이 두 상태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지 상태뿐이다. 체스 놀이에 있어서 그 어떤 특정 형세건, 그것은 선행된 형세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기묘한 특성을 지닌다. 즉,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러한 형세에 다다랐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체스 놀이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라 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와서 놀이의 상태를 살피는 훈수꾼보다 더 유리할 것은 추호도 없다. 즉, 그 순간의 형세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10초 전에 일어난 일을 상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모든 것은 똑같이 언어에 적용되며, 통시적인 것과 공시적인 것의 근본적인 구별을 시인해 주는 것이 된다. 화언은 하나의 언어 상태에만 작용하며, 상태와 상태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 상태 속에 어떠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 최승언 옮김,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 1990), 108.]

나는 오랫동안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체스 비유가 뜻하는 바에 십분 공감한다. 바둑을 두다보면 판의 흐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 흐름에서 벗어나 ‘형세판단’을 할 줄 알아야 고수가 될 수 있다. 전투에서 실패해서 대마가 잡혀버린다든지 하면 얼굴이 벌개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이전의 흐름은 마음에서 지우고 순수하게 판 위의 형세를 읽어보고 계가를 해보면 의외로 형세가 불리하지 않거나 포기할 만큼은 아님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지금까지의 흐름(통시적 변화, 역사)과는 별도로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승부를 위한 냉정한 판단이 된다. 구조를 읽어내려는 노력, 그것이 내가 바둑에서 배웠던, 아니 배우려고 했던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사유는 내게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최근의 예로는 논문을 준비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논문을 쓰다보면 자기가 열나게 써온 것에만 열중한 나머지, 남들이 그런 준비과정을 전혀 알아주지 못할 때 섭섭한 경우가 많다. 선생이 성의 없이 씩 보고 뭐 이런 걸 썼냐는 식으로 반응하면, 몇 달 동안 열심히 키운 내 새끼가 버림받는 기분이 확 드는 것. 하지만 써왔던 흐름일랑 잊어버리고 현재 이 시점에서 학계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 구조주의적인 형세판단을 거치는 것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림을 그리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이야기가 좀 새었지만, 불교의 공(空) 사상을 설명한 글에서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만났다. ‘그 사건 만큼만 본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삶으로 체화하는 구조주의적인 사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는 아쉽게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저자는 “공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기에 그것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공 개념은 한 사건이 그것으로 종말이 아님을 알린다. 또한 그 사건이 우리 삶에서 행하는 월권행위를 비판한다. 불교에서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 사건 만큼만 본다는 의미다. 거기에 과장된 기대를 주입하면 이제 사실은 부재한다.
[김영진, <<공이란 무엇인가>>(그린비,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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