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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성원이 친구 토마스

by 방가房家 2023. 5. 22.

돌이켜보면, 어릴 때 내 상상 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계몽사 세계문학 전집 15권(안데르센 7권+그림형제8권)과 (출판사는 까먹었는데) 전래동화전집 10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칙칙한(?) 안데르센 이야기보다는 다채로운 그림형제 이야기를 좋아했다. 과자로 만든 집 나오는 헨젤과 그레텔도 즐겨 읽었고, 빨간 구두 신고 하도 춤 춰대는 바람에 나중엔 발목이 잘리고, 잘린 발목만 남아서도 춤을 계속 추었더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내 기억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엽기적인 이야기들도 있었다. 하여튼 민담 세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은 필시 내가 글을 읽은 이후의 일일텐데, 5살 이전에는 어떤 것들을 보고 좋아했는지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두 돌 난 내 조카 성원이가 좋아하는 것은 토마스라는 기차와 니모라는 물고기이다. (디즈니 만화란 게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니모야 자연물인 생선에 붙여진 이름이고, 니모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바다 생물들을 학습하고 있으니 이해해줄만 하다. 그런데 토마스라는 녀석은 기이하다. 자연의 사물도 아니고 주변에서 접하는 기계들(전화나 텔레비전 자동차와 같은)도 아닌 추억의 테크놀로지, 기차에 그렇게 애정을 쏟다니 말이다.

토마스를 우연히 본 건 미국에서 텔레비젼을 볼 때 였는데 (영어 공부하려고 어린이 프로도 꽤 많이 봤다. --;), 단순히 장난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미국은 특히나 기차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사회이다. 들은 얘기로는 자동차 많이 팔아먹으려고 자동차 회사들이 대중 교통수단인 기차 회사 운영이 어렵도록 방해했다고 하더라. 앰트랙이라는 기차회사가 있긴 한데, 비행기 아니면 자가용을 생각하는 미국 사람들이 기차를 타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곳에서 기차 만화가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그 기차들이 애들의 옷이며 장난감에 활용되고 있었다. 아이들 세계가 온통 기차판이다.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하는 성원이의 언어는 거의 두음절 체계이다. 하는 말이 거의 두음절짜리이다. 할머니는 “함미”라고 부르고, “너 이거 하면 안돼”라고 야단을 치면 “안돼”라고 따라한다. “삼촌 여기 아프니까 때리면 안 돼”를 번역하면 “반준 아야”이다. “가오리”라는 예외 외에는 세글자 단어를 잘 말하지 않는 아이인데,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영어 이름들은 용케 흉내를 낸다. 고든과 하비는 비슷하게 소리를 내고, 제임스는 “제민쯔,” 토마스는 “버지지”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이 아이의 두음절 언어체계를 파괴하며 침투하는 이 외국 친구들의 힘은 대단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데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은 우문이 될 것이다. 그네들이 무슨 기차에 대한 향수나 선망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만화로, 장난감으로 주변에서 보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애가 보채서 책 한 권 읽어준 적이 있는데, 내용이 만만치 않았다. 기중기로 기차를 싣는다든지, 화차가 전복되어 사고가 났다든지, 난해한 내용이었는데, 사실 내용은 상관없다. 성원이는 그저 그림 보면서 “제민쯔, 버지지!” 소리만 치면 되는 것이다.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고 장난감으로 팔리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이미지의 힘이 그저 이유일 것이다.
토마스 기차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그 ‘세계’란 것은 주로 영어권인 것 같다. 영국에서 만들어져 미국, 호주 등에서, 그리고 영어권 좋아하는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있는 것 같다. 니모와 함께, 토마스는 아이들의 “영어 친구”이다. 그 점이 부모들에게는 중요할 것이다. 서점에 가면 토마스와 친구들 영어 원서들도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차 이야기는 레버랜드 오드리라는 영국 목회자(아마 성공회 신부인 것 같다)가 1945년부터 아이들에게 해 준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의 이야기가 1980년대에 만화로 그려지고 최근에는 예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차는 개화기 이후 상당 기간동안,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라는 노래가 불려진 1960년대 해도 신문명의 상징이었다. 1940년대의 영국에선, 아마 일상적인 애착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추억의 매개물인 동시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새롭고도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존재한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상상의 대상과, 그것이 매개하는 현실의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물음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미국의 자본에 의해 주어진 상상물들이 앞으로 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게 될까? 과연 토마스는 상상 세계 속에 남아있을 것인가? 딴나라 소도어 섬에서 살고 있는 공상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을까? (미국애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아니면, 현실 속의 기차와의 만남을 시도할 것인가? 지하철을 보면서, 혹은 비둘기호를 보면서 토마스 이야기를 떠올리는 상호작용이 일어날까? 어떤 부모들은 토마스가 영어 친구로 남아있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토마스가 현실의 실재와 조응할 때 다른 의미있는 상징이 구성될지도 모른다. 토마스가 토착화된다면, 혹은 토마스가 한국의 맥락에서 번역될 때, 현실이 이야기에 새로운 층을 씌우고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창을 제공하는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 소도어 섬의 고든이 영국 어부들의 냄새나는 생선을 나르듯이, 우리나라의 토마스는 도시의 일상에 지친 부모님들을 실어나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지도 모르며. 그 예쁘게 생긴 기관차 아저씨들이 박봉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때론 파업과 같은 어려운 일도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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