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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vision (환시幻視)

by 방가房家 2023. 5. 16.

1. 종교적인 맥락에서 ‘비전vision’은 영적인 존재나 절대자를 만나 계시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신비경험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영한사전의 뜻풀이에서 이 종교적 맥락을 알기는 쉽지 않다. 동아프라임(네이트 제공)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vi·sion ━ n. 
1  시력(sight), 시각; 시야; 관찰
2  [관사 없이] (시인·정치가 등의) 상상력, 직감력, 통찰력; 미래상, 비전; 선견지명
3 환상, 환영, 몽상; 환각, 환시  in a vision 허깨비로  have a vision 환영이 나타나다
4 보이는 것, 눈에 비치는 것, 모양, 광경 
종교적 맥락의 의미는 3번에 해당한다. 사전에서는 부정적인 맥락을 강조한다는 점이 아쉽고, 종교의 전문용어로 사용된다는 설명을 누락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vision'의 번역어 후보인 환상幻像과 환시幻視가 모두 실려 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영한엣센스(아래아한글 제공)에는 해당 부분의 설명이 “환상, 환영, 곡두, 환상적인 입장”이어서 환시가 대응어로 제시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2. 사전에서 종교적 맥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단어가 심리학적인 맥락에서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전’은 (심리상태가 불안정하여) ‘헛것을 본 것’이라는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현대 대중의 일반적인 정서이고, 환상/환시라는 한자어에도 암시된 중요한 의미이지만, 이 현상의 다른 면도 존중될 필요가 있다. 즉 ‘비전’은 종교사에 걸쳐 계속 나타나는 중요한 신비경험의 하나로 그 실체성을 믿는 공동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정되어야 한다.

 
3. 'vision'의 번역어는 통일되어 있지 않다. 큰 맥락에서 보면 개신교 성경에서 사용된 환상幻像과 가톨릭 성경에서 사용된 환시幻視가 경쟁하고 있으며, 이도저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그냥 ‘비전’이라고 사용하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내 경우에도 상당히 갈팡질팡 했다. 평소엔 환시가 좀 낫다고 생각하다가도 <<자리 잡기>>를 번역할 때는 주된 성서 번역으로 사용한 개신교 ‘새번역’에 맞추어 환상을 선택했다. 에제키엘이 아닌 에스겔을 선택한 이상, 일관성을 유지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에스겔의 환상’이나 ‘에제키엘의 환시’가 일반적인 감각이라 ‘에스겔의 환시’라고 하는 게 좀 부담스러웠기 때문. 하지만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환시를 밀고나갈 것이다.
 
4. 내가 가톨릭 용법을 지지하는 이유는 환시가 단순히 성경에서 사용된 번역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가톨릭의 신앙 전통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살아있는 경험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중세 성인전에 기록된 성인들의 종교경험에서,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기적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환시’들을 만날 수 있다.(내가 환시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중세의 종교 경험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책 <<연옥의 탄생>>(최애리 옮김)에서였다.) 이 전승의 무게와 경험의 연속성을 인정한다면 나의 선택은 자연스레 환시로 이끌리게 된다.
 
5. 더 중요한 것은 용어가 현대어에서 어떤 어감을 갖느냐는 것이다. 환시라는 생경한 어휘보다는 환상이 더 받아들일만한 어휘라고 생각하는 입장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을 말한다면, 환상이 우리에게 친숙한 어휘라는 점은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이다. 약점의 치명성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 문화에서 환상은 ‘판타지’이다. 이 언어를 통해 독자들이 종교경험을 떠올릴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며, 설사 있다 하더라도 병리적 현상으로서일 것이다. 차라리 전통성을 가진 동시에 낯선 말인 환시라는 말을 통해서 그런 종류의 종교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떠올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 
전에 사이먼과 가펑클의 "sound of silence"에 대한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 가사에 등장하는 'vision'은 환시라고 번역해야 이해가 될 것이다. 어느 번역 가사에서는 이렇게 되어있는 부분이다. “내가 잠든 사이에 어떤 환영이 살며시 다가와 씨를 뿌리고 갔거든. 내 머리 속에 심어진 그 환영은 침묵의 소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어.”(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환영은 환시가 되어야 한다. 이 대목은, 꿈속에서 환시를 받았고 거기서 받은 깨우침이 아직 침묵의 소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는 종교적인 내용이다.
 
6. 환시幻視는 단어 상 종교경험의 시각적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영적인 존재와의 만남이다. 그래서 이 말은 'apparition'과 의미상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apparition'의 영한사전의 풀이는 “1)유령, 망령, 환영 2)경이적인[불가사의한] 것 3)(모습 등의) 출현”이다. 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대응어가 실려 있지 않다. 이 단어 역시 가톨릭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아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성모께서 ‘발현’하셨다고 한다. 나는 발현이 사전에 꼭 실려야 하는 풀이말이라고 생각한다.
 
7. 우리의 전통적인 어휘 중에는 이런 종교경험을 지칭하는 어휘가 없을까? 달랑 책 한 권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최근에 <<천예록: 조선시대 민간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을 검토한 결과를 이야기하면 이렇다. 우리나라에선 영적 존재와의 만남이 주로 “꿈에 나타났다”고 표현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어휘 중에서 이를 가리키는 단어가 '현몽現夢'(사전풀이: 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이다. <<천예록>>에서는 ‘꿈에 나타났다’[夢見, 見夢]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서 ‘見’은 ‘견’보다는 ‘현’으로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 둘은 서로 통하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봄’은 ‘나타남’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것은 영어표현 'vision'이 'apparition'과 사실상 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천예록>>에는 ‘꿈에 나타나 계시하다’라고 번역된 ‘현감夢感’이라는 표현도 나타난다. 계시라고 의역된 부분의 한문 표현은 ‘감응感應’이나 ‘감통感通’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전통적으로 귀신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지시하는 어휘이다. 
[‘현몽’은 개역 성경 번역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꿈속의 계시임이 분명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예를 하나 들면,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마 2:13)]
 
8. 전통적 표현에 대한 내 생각을 잠정적으로 말하면, 비슷한 종교경험에 대한 표현이 존재하지만 그 어휘는 시각적 경험에 주목하여 형성되기보다는 꿈이라는 현상에 주목하여 형성되었다는 것. 하지만 용례에서는 통하는 부분이 많다. 
마지막으로 다소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수운水雲의 종교경험을 비교해볼 수 있겠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何仙)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이것은 절대자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특출하며, 꿈으로 매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전통적인 만남과도 다르다. 이 만남에서 시각적 경험이 배제된 것에도 주의할 것. 그래서 이것은 환시幻視가 아니라 환청幻聽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경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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