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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의 샤머니즘 개념 논의

by 방가房家 2023. 5. 9.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였던 손진태(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는 1927년 글, “한국상고문화연구”에서 한국 무속에 샤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적용은 ‘종교학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눈이 번쩍 뜨이는 표현이다. 1920년대라는 이른 시기에 종교학적이라니? 잘 읽어보면 지금과 같이 학문분과로서의 종교학을 일컫는 표현은 아니고, ‘종교에 대한 연구’라는 문자적 의미에 가까우며 이 때 사용된 ‘종교’의 영역에 주의할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된다. 단순히 종교학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서가 아니라(우리나라에 ‘종교학’이라는 말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신학’이라는 의미로 처음 나오긴 한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의 엄밀성이나 이론적인 논의의 깊이 때문에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게 된다. 손진태의 논의에 함축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손진태가 반대한 것은 ‘샤머니즘’이라는 당대의 지적인 유행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애초 시베리아 지역에 사용되었던 용어가 다른 아시아 지역이나 아메리카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현상으로 상정되었던 것이 1920-30년대의 지적 유행이었다. 이 지적 유행의 결과는 엘리아데의 <<샤머니즘>>(1951)에 집대성되어 있다. 당시 한국 학자들은 한국 무속을 샤머니즘으로 보는 태도를 가졌는데, 손진태는 이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쟁점으로, 여기서 그 가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서구 용어의 출발점과 용례를 꼼꼼하게 되짚어 올라가며 한국에서의 적절성 여부를 따지는 손진태의 ‘깐깐함’이다.
2. 손진태가 ‘샤먼’에서 지적하는 것은 용어에 내재된 위계이다. 그는 처음 시베리아에서 ‘샤먼’이 보고되었을 때, ‘거기엔 사제가 없다’는 문장이 있음에 주목한다. 샤먼은 사제가 아니라 주술사라는 차원에서 이야기 된 것이다. 여기엔 사제/주술사, 그리고 주술/종교의 구분이 내포되어 있다. 풀어 말하면, 시베리아에서 관찰된 현상을 유럽 관찰자가 ‘샤먼의 것’이라고 명명했을 때에는, ‘이것은 종교에 속한 사제의 행위가 아니라 주술에 속한 주술사의 행위이다’라는 함축을 갖는다. 샤먼에 관련된 체계인 ‘샤머니즘’은 종교현상이 아니라 (그보다 저급한) 주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샤먼은 가치평가적인 개념인 것이다.
3. 손진태의 지적은 정확하고 긴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19세기 말 처음 개념이 생성되었을 때의 가치평가적 함축을 아는 것은, 1920년대에 그 개념이 처음의 가치평가를 극복한 개념으로 재정립되었는가를 따질 필요를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제기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이 보편적 개념으로 유행하던 시기에는 샤머니즘의 ‘종교 아님’이라는 처음 구도에서 변화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시 학계에서 그런 이론적 재정립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유효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적 재정립은 후에 엘리아데에 가서야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샤머니즘에 대한 1900년대 초의 서구 논의를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4. 손진태가 대안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개념의 구분이다. 그는 사제와 주술사의 구분을 받아들이고, 주술사는 ‘악령숭배’에 사제는 ‘다신숭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한국 민간 신앙에는 그 두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손진태의 대안적 제시는 받아들일 만 한 것은 아니다. 개념에 내재한 이분법, 그 이분법의 가치평가적 함의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구분에 기초한 개념쌍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입장에서 악령숭배/다신숭배라는 진화론적인 도식에 입각한 주술사/사제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다.
6. 손진태가 샤머니즘 논의를 ‘비종교학적’이라고 한 것은 주술/종교의 이분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속을 주술적인 것(샤머니즘)으로 보면, 그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7. 손진태는 주술/종교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새로운 논의의 틀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그것이 그의 제안이 그대로 수용될 수 없는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입장에서의 평가이지, 당시의 손진태에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이론적 논의에서 주술과 종교의 구분은 넘어서기 힘든 전제라고 생각된다. 당대의 가장 뛰어난 종교이론가인 뒤르켐조차도 종교와 주술의 구분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부분이 그의 고전에서 블랙홀로 남아있지 않은가! 손진태의 이론적 논의의 수준은 1920년대 조선이라는 맥락에서 놀라운 것이다.
[얼마 전 제출한 과제물에서 관련된 부분을 아래에 붙여 놓는다. 또한 위의 논의가 담긴 손진태 저작을 첨부파일1로 올린다. 또한 종교와 관련된 다른 논의들을 첨부파일2, 3, 4, 5로 올린다.]

최남선은 “薩滿敎箚記”(1927)에서 샤머니즘에 대한 그의 지식을 열거하였다. ‘차기’(箚記)란 ‘책을 읽으며 얻은 바를 그때그때 적어 놓음’을 뜻한다. 이 글에서 그는 ‘샤아먼’[薩滿]은 한국어로 무당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무속을 시베리아 종족들의 신앙과 연장선상에 놓는다. 그는, 무인(巫人)은 다령숭배(多靈崇拜)와 자연숭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서술한다. 무속을 샤머니즘으로서 논의하는 것은 당시 다른 학자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1932년 일본 대정(大正) 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학계에서 활동한 김효경(金孝敬)의 ‘무속이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졸업논문인 “무당에 관하여”(1933)에서 “무당은 조선어로 샤만을 의미하는 명사”라고 명시한다. 그는 샤머니즘이 인류의 인지발달상 반드시 경과하는 종교 발달의 일반적인 단계라는 당시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 내에서 발달한 독자성 때문에 무당에 의해 형성된 신앙체계를 ‘무당이즘’이라고 부르는 절충적인 제안을 한다. 무당이즘은 조선의 샤머니즘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또한 진보된 샤머니즘이라는 의미를 겸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무당에 있어서 死神接神”(1935)과 같은 실제적인 조사 작업을 행하였다.
무속을 샤머니즘과 동일시하는 당대의 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가졌던 학자는 손진태였다. 그가 “韓國上古文化硏究: 韓國古代宗敎의 宗敎學的 土俗學的 硏究”(1927)에서 제기한 이론적인 비판은 상당히 철저한 이론적 검토를 바탕으로 한 논의이기 때문에 주목할 만 하다. 그는 한국 민간신앙에 ‘샤머니즘’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비종교학적’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고유 종교를 무당의 종교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회학적 또는 통속적 견지’이지 ‘종교학적 견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샤먼이라는 용어에 사제(=승려)/주술사(마술자), 더 나아가 종교/주술의 이분법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초기에 샤먼을 보고한 문서에 ‘승려는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음을 지적한다. “종교학상에 마술자(魔術者, magician)란 것은 악신 혹은 악정령을 적극적으로 구축(驅逐)하는 자요, 승려란 것은 병의 회춘이나 기타의 행복을 위하여 신에게 소극적 기도법을 취하는 자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론상 마술자와 승려 사이에는 엄연한 분별이 있다.”(135)
그가 대안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악령숭배’와 ‘다신숭배’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종교학에서는 무격의 기능을 분석하여 마술자[醫巫] 혹은 험술적(險術的) 종교(Magico-Religion)에서 취급할 것이요, 승려로서의 무격은 다신교적 신앙에서 승려로 착주(着做) 취급하여야 할 것이다.”(146) 손진태의 주장에는 종교와 주술의 구분이라는 당시 학계의 구분을 근거로 한다. 특히 종교를 성의 영역에, 주술을 속의 영역에 놓은 뒤르켐의 구분을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종교학적/통속적이라는 그의 용어는 그 구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손진태가 받아들인 구분은 지금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만, 1920년대에 그 정도로 제대로 된 차원의 이론적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손진태는 “朝鮮 古代 山神의 性에 就하여”에서 한국의 산신들이 대부분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표상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 산의 명칭들에 ‘어미산’, ‘할미산’에 해당하는 ‘모’(母)와 관련된 명칭들이 많음에 주목하고, 이는 고대에는 여산신(女山神)이 존재한 흔적이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이는 고대 모권 사회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부권(夫權) 사상이 발달됨을 따라 여산신에 부신(夫神)이 없지 못할 것을 요청하게 되고, 필경은 남신이 주신(主神)이 되어, 여신은 단지 산신의 처(妻)란 지위까지 하락된 것”(313)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바호펜 류의 모권제 사회에 대한 주장은 유지되기 힘들지만, 그가 말한 대로 “종교 사상이 사회사상에 따라 변천되는 일례”로서 작은 측면에 주목한 것은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손진태의 작업 중에는 고대 문헌의 기록에 대하여 현재의 민속자료를 통하여 해석의 조명을 시도한 것이 많다. “蘇塗考”에서 그는 소도를 출입이 금지된 특별한 성역으로 해석한 종래의 해석을 대한 검토하였다. 그는 ‘읍’(邑)을 읍락, 주거지로 해석하여 현재의 마을신앙의 민속의 관계를 논하였다. “三國遺事의 社會史的硏究”(1949)에서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 삼칠일, 기자신앙의 요소들을 민속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기본적으로 단군 신화를 웅녀가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어서 아들을 얻었으므로 이름을 단군으로 하였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며, 후대에 첨가된 요소와 본래적 요소들을 구분하는 작업을 면밀하게 진행하였다.

손_샤만.pdf
1.71MB
손_조선산신의성.pdf
1.18MB
손_소도고.pdf
1.95MB
손_삼국유사.pdf
1.36MB
손_광명에대한신앙.pdf
2.1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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