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인 관점에서, 또 국적을 불문한다면, 1927년부터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아카마츠 지조(赤松智城)는 한국 최초의 종교학자라고 할 수 있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문제가 된다면 빼도 상관없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서양 학문’인 종교학을 습득한 정도에 있어서나 한국의 종교 자료를 수집한 정도에 있어서나, 당시에 아카마츠 정도의 수준에 오른 학자는 없었으며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카마츠는 아키바와 함께 한국 무속을 답사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들의 자료수집은 일본 경관들을 대동하고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자료 수집의 정황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어 올려놓는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펴낸 유리건판 사진전 책자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에서 스캔해놓은 것이다.
첫 번째 사진은 강원도 고성에서 굿하는 장면이라고 설명이 달려있다. 굿하는 사람들 뒤에는 아키바, 아카마츠, 그리고 경관 한 사람이 서있다.(누가 아키바이고 아카마츠인지는 모르겠다.) 정황에 대한 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에서 풍기는 분위기로는 굿이 열리는 곳에 가서 참관하는 ‘참여관찰’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찰이 와서 굿을 ‘시켜놓고’ 쳐다보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두 번째 사진은 개성 덕물산 도당굿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데, 일본인 관찰자에서나 사람들의 움직임에서나 비슷한 정황이 느껴진다.
식민지 권력 주체와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피식민지 사람들과 피사체로서의 위치에 대해서는 최근에 좋은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으며, 우리나라 자료에 대한 책으로는 권혁희의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민음사, 2005)를 얼마 전에 인상적으로 읽었다. 세 번째 사진은 개성 덕물산에서 풍물패와 일본인 학자가 함께 찍은 사진인데, 피사체로 잡힌 풍물패의 불안한 표정이 잘 드러난다. 이 사진이 특이한 것은 아니고, 이 시기 사진에 잡힌 조사 대상으로서의 조선인들의 표정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 지 모르는 불안한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아카마츠와 아키바의 연구는 <<조선 무속의 연구>>(동문선, 1991)에 함께 있는데, 과제물로 내기 위하여 날림으로 쓴 것이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두었던 것을 덧붙여 놓는다.
아카마츠 지조(赤松智城)는 1927년 초에 경성제국대 교수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1926년 11월 경성제국대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아카마츠와 아키바는 ‘성과 속의 회합(會合)세대(世帶)’라는 연구실을 구성하여, 아카마츠가 종교학의 성(聖)의 측면을, 아키바가 사회학의 속(俗)의 측면에서 한국 무속을 공동으로 연구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아카마츠는 유럽, 미국, 이집트를 거치며 종교학과 이슬람을 연구하고 일본에서 종교연구회를 창설한 종교학자였고, 아키바는 런던 대학에 유학하여 웨스터마크와 말리노프스키, 그리고 모스의 세미나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사회학자였다. 두 학자의 공동연구는 1928년에 시작되고 1932년 본격화되어 아카마츠가 1941년 사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카마츠는 아키바와 함께 무가, 무경, 무속 의례, 의례 장비, 무속인의 생활 등 한국 무속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속 신 개념, 무속의 문화사적 위치와 도불과의 관계에 대하여 중요한 글을 남겼다. 아카마츠의 <무속과 도불이교와의 관계>에서 “하느님 신앙은 원래 무속에서는 그다지 유력하지 않고, 또한 기독교도는 그 유일신을 이 하느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그 신앙을 오늘날 특별히 고조시키는 것은 반드시 시기적절한 조치는 아닐 것이다.”(<<한국 무속의 연구>>, 317)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느님 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는 <무속의 신통과 성소>에 나오는데, 여기서 아카마츠는 헐버트, 언더우드, 클락으로 이어지는 ‘고유 유일신 하느(나)님 신화’를 통렬하게 공박한다. 그는 하느님 숭배가 독자적인 고유 전통으로 존재해왔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다음 자료들을 제시한다. 바리공주 무가 첫 부분이 “천님이 알으소사 위로는 33천(天), 아래로는 28수(宿)”(117)로 시작한다는 것. 또 제주도 무가 중에서 “좋은 날 좋은 시간에 하강일과 복덕일을 택하고, 불도를 수행하여 천신(天神)을 제사지내며 만신(萬神)을 접대한다”(118)는 대목이 등장한다는 것. ‘천신님’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과 나란히 열거되어 있는 가사가 있다는 것. 이 사례들에서 하늘신은 도교, 불교의 개념들과 함께 존재한다. 더구나 하늘신이 지고신으로서 우월한 위치를 갖는 것도 아니다. “천주(天主) 또는 천신(天神)으로서의 하느님과 그것과 서로 융합된 옥황상제는 현재 이 신통(神統)에 있어서 다른 유력한 제불제신(諸佛諸神), 예를 들면 석존, 제석, 일월성신, 칠성신, 시왕(十王) 등과 함께 존재한다. …… 몇몇 영웅신과 무조(巫祖), 성주신, 본향신(本鄕神), 산신(山神)과 목신(木神) 등의 경우에 이러한 교체관계는 인정되고 있다.”(121) 이러한 근거에서 아카마츠는 헐버트의 유일신론(henotheism) 개념 사용이 뭘러의 원래적 용법에 대하 오해를 내포할 뿐더러 한국 무속에 적용될 이유가 없음을 잘 지적한다.
아카마츠는 비교 고찰을 통해 무속이 동아시아에 공통된 원초적 종교문화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연구 곳곳에서 불교, 도교와의 혼합의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혼합에 대한 아카마츠의 태도는 경멸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특한 종교문화를 형성한 동력으로 보는 점이 눈의 띤다. “(동아시아의 원시 북방 민족이 전래한) 샤만교적 기초 위에, 또한 그 형식 속에서, 조선 특유의 문화와 함께 차츰 도교와 불교의 요소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무속은 전체적으로 그 내용을 풍부, 복잡하게 발달시킨 것이다.”(315)
물론 일제 학자로서 아카마츠의 활동에 강한 정치적 맥락이 존재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 식민 지배의 필요에 의해 요청되었다는 것이 그의 경성제국대 교수 임용, 심전(心田) 개발, 그리고 만주국에서의 활동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신 박멸’을 논하는 다음의 인용문이 그의 연구의 진정한 결론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는다. “일률적으로 무속을 강압하려고 한다면, 이들의 신앙과 행사도 완전히 박멸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방책은, 기존의 신앙행사를 적당하게 개선하고 또는 선도하는 수밖에 없다. ……內鮮의 교섭도 고려하여……조선의 무속을 선도할 근본적인 방책은 ……왜곡된 그 무속 속에 포용되어 있는 불교적 요소를 무격과 그 신자들에게 정통화하고……요컨대 종래에 지나치게 등한시했던 종교적 교화 또는 종교적 사회 교육의 민중에 대한 적절한 실시가 이 경우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316-317) 이것은 본문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다만 국가 정책에 필요한 진술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941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임한 이력과 더불어, 일본 정부와 아카마츠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는다.
아키바는 집중적 조사방법(intensive method)을 주장하여 당시 유럽 사회과학의 흐름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한정된 지역에 대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기초로 연구 고찰하는 것을 말하는데, 비록 말리노프스키가 주창한 현지조사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아키바의 연구 환경에서 비슷한 실증적 지향성을 실천하고자 했던 방법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아키바가 무병(巫病)에 레비-브륄의 신비적 참여(participation mystique)로 설명한 것(64)이 적절한 개념 사용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어찌되었건 그는 여러 곳에서 서구 사회과학 개념을 사용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아키바의 저작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론적 영향은 뒤르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뒤르켐을 직접인용한 대목은 무속 의례를 분석하면서 소극적/적극적 의례를 이야기한 것이다.(67, 144) 직접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아키바가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과 속의 개념은 뒤르켐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스러운 장소에 대한 서술에서 성속의 “성속의 융통성”(199)을 언급한 것에서 뒤르켐 개념의 적용이 두드러진다.
아키바의 한국 무속 서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시/농촌, 유동/고착, 남성/여성, 능동/수동 등의 이분법적이 구도이다. 흔히 이분법적인 서술이 그러하듯이, 아키바의 서술은 ‘여성적 속성’을 전제로 하여 자료를 수동적 대상으로 고착시키는 위험성이 있다. “여무가 많다고 하는 점은…… 조선의 무속이 여성적, 모성적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49) “한국의 무속이 성속 관념이 유동하는 가족적 종교이고, 특히 여성이 신앙하는 모성적 종교라는 점에 대해서 나는 가족제도를 근본으로 하는 농촌사회의 종교문화로서 이해하고자 한다.”(<<朝鮮巫俗의 現地硏究>>, 119) “농촌사회는 도시사회에 비해 성원의 동질성이 강하고 유동성이 약하기 때문에 그 종교적 문화의 면에서도 쉽사리 오랜 전통을 잊지 않는다.” (<<朝鮮巫俗의 現地硏究>>, 1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제사가 남성과 여성의 이중적 구조로 되어있다는 서술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의 속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설득력있게 서술된다. “임시가제의 가장 중요한 기회로서 출생, 질병 및 사망의 세 가지 제의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임신 및 출생에 관한 일련의 행사는 오로지 여성들의 관심이고 질병 및 사망에 관한 굿도 역시 여성의 제의이다. ……굿 할 때마다 어머니는 딸에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집안의 전통을 교육시키는 중에 무속에 의한 공동의식이 길러지며 강화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어, 그녀들만의 세계를 가지는 것이다. (<<朝鮮巫俗의 現地硏究>>, 116-17) 그 결과 “유교의례의 가제(家祭)와 더불어 무속의 가제(家祭)의 이중조직”(189)이 생긴다. 그것은 가제와 동제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 “가제(家祭)에서 주제자(主祭者)가 가무(家巫)로서의 주부이며 여성인 것이 보통인 데 반해, 동제(洞祭)의 주제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선택된 제관(祭官)이며 남성이 일반적으로 행한다는 점이 다르다.”(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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