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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ng Religion> 5장: 만나와 마나 이야기

by 방가房家 2023. 5. 9.

이 글은 만나와 마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서에 나오는 음식 만나와 멜리네시아에서 보고된 종교적 개념 마나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다. 만나 이야기는 만나라는 음식 이름이 다양한 이야기 구조에 따라 어떻게 다양하게 쓰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나 이야기는 인류학 보고에서 출현한 마나 개념이 어떻게 종교학의 이론적 논의를 주도하는 재료가 되었는지를, 특히 뒤르켐과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통해서 살피는 이야기이다. 둘은 발음만 비슷하지 관련이 없다. 글 끝부분에서 꽤 멋있게 마름질을 하긴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스미스 특유의 지적인 탐미주의에서 비롯된 글 구성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글에서 찾아낸 만나와 마나 사이의 유일한 끈은 주35이다. 이 주에서 스미스는 뒤르켐 저작 영역본(Field의 것)에 있는 오타를 지적한다. 그것은 만나가 들어갈 자리에 마나가 들어간 것,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나가 존재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필라(만나manna의 일종) 씨족에서는 의식이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인티츄마 날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큰 바위가 있는 곳에서 만난다. ... 알라툰자는 바위께 흙을 파서, 알체링가 시대 때부터 거기 묻혀있었다고 이야기되는 추링가를 파내는데, 이것은 마나mana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뒤르켐이 이론적인 필요에 의해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있지도 않은 ‘마나’를 그의 논의 중간에 억지로 밀어넣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이 글에서 스미스의 가장 중요한 지적이라고 볼 때, 있지 않은 마나를 있게 한 위의 오타는 스미스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오타가 ‘양피지 속에 들어간 지푸라기’처럼 이 글을 쓰게한 우연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Jonathan Smith, <<Relating Religion>>, “5. Manna, Mana Everywhere and /‿/‿/”
 
 
유리피데스 양피지 사본에 우연히 들어간 지푸라기. 이것은 이 지푸라기를 점으로 오인하고 베껴 쓴 사본에 비해서 지푸라기가 든 사본이 오래되었음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성서 이야기에 나오는 만나와 인류학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마나에 대한 이야기. 성서의 경우 증거의 ‘거기 있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반면에, 인류학의 경우 증거의 ‘거기 있음’이 아님은 이론적 관심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I: 만나
 
사전에서 만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만나 [manna] 여러 가지 식물들 또는 수피에서 나오는 생성물을 일컫는 식물학 용어. 소아시아가 원산지인 레카노라속(―屬 Lecanora) 지의류(地衣類) 중 특히 레카노라 에스쿨렌타(L. esculenta)를 만나라고 하는데, 중동지역에서는 빵과 만나젤리를 만드는 데 쓰고 있다. 또한 '낙타의 가시'라 부르는 알하기 마우로룸(Alhagi maurorum)과 알하기 프슈달라기(A. pseudalhagi)의 두 식물에서 나오는 수지를 말하기도 한다. 이 두 식물 모두 가시 모양의 가지가 나며 키가 1m 이하인 관목으로 소아시아가 원산지이다. 타마릭스 만니페라(Tamarix mannifera)의 줄기에서 흘러나오는 흰 벌꿀 같은 물질은 먹을 수 있는데 이것도 만나라고 부른다. 깍지벌레가 나무줄기를 뚫어서 수액이 흘러나오게 하거나 나무 스스로 만나를 분비한다.

(보덴하이머Bodenheimer 책에서 가져온 만나 사진)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만나의 사실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만나에 함축된 의미중 하나이지 그 외연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내에서 마나가 언급된 방식을 볼 것.
 
1-1) 긍정적인 이야기 틀에서 ‘만나’는 아버지 같은 야훼가 백성들에게 먹이는 양식이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한 이 먹거리”(출16:32)이다. 시편105장에서 노래한 이미지이다, “그들이 먹거리를 찾을 때에, 그가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시며, 하늘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주셨다.”
1-2) 긍정적인 이야기 틀로부터 야훼의 속성을 말할 수 있다. 야훼가 하는 것은 과잉이다. 만나는 역현力顯, “나 주가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해주는 힘의 풍부한 과시이다.
1-3) 다른 속성은 율법을 지키는 신이다. 기적을 행하는 가운데서도 규율을 지키는 이이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명하시기를, 당신들은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 각 사람은,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으니, 엿샛날에는 내가 너희에게 양식 이틀치를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아무도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2-1) 긍정적인 쪽이 야훼와 함께 지낸 낙원 같은 시기로서의 방랑을 이야기한다면, 부정적인 쪽은 불복종과 반항의 시기로서의 방랑을 이야기한다. 야훼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망’이 주제가 된다. 출애굽기 16장에서는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를 회상하며 원망하자 그에 대해 마나를 주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2-2) 민수기 11장에서는,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고 불평한다. 그러자 야훼의 축복은 신의 분노의 표현, 저주로 돌변한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들이 일어나 바로 그 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 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다.”
2-3) 이런 이해가 더 복잡하게 나타난 것은 에즈라의 연설에서이다. “굶주릴까봐 하늘에서 먹거리를 내려 주시고, 목마를까봐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 주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그 놀라운 일들을 곧 잊었습니다. ... 그들의 입에 만나가 끊이지 않게 하시며,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습니다.”
 
3) 이야기에 대해 사유하면서 이에 대해 다른 이해가 생겨난다. 신명기 8:3이 그 예이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만나는 도덕적 가르침의 원천이 된다.
 
4) 후대 1세기경 유대인의 그리스어 저작에서 나타나는 이해. “주님의 백성들은 천사들의 양식으로 먹여 살리셨다. 주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빵을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꾸준히 내리셨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고 기쁨을 주는 빵이었다.”(지혜서 16:20) 여기서 만나는 창세기와 대비되는 ‘고통 없는’ 양식이다. “얼음 모양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그 양식은, 불에 닿으면 녹아야 할 텐데 녹지 않았다.” 여기서 만나는 신의 음식(ambrosial divine food)으로 해석된다.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 만나는 그리스어 만나로 옮겨졌고, 그리하여 불멸의 암브로시아라는 그리스 어휘가 히브리 어휘 위에 겹쳐진다. 바룩3서에서 이러한 겹쳐짐을 볼 수 있다. “피닉스가 무엇을 먹느냐? 천상의 만나와 지상의 이슬이다.”
 
 
II: 마나
 
코드링턴이 막스 뮐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소개된 이래, 마나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며 종교 이론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는 있지 않은 마나에 대한 뒤르켐의 주장으로부터 어디에도 없는 사물 범주로서 마나를 제안한 레비-스트로스로의 이동을 살펴본다.
 
뒤르켐은 <기본 형태들>에서 처음으로 마나를 불러내어 성聖과 짝지운다. <기본 형태들>은 종교학사에서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주장을 담은 책이다. 첫 문장에서 ‘사회’로 ‘종교’를 번역한 것부터 시작해서, 이 작품은 분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수사적이고 지적인 모멘텀을 이루고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뒤르켐이 그의 논제를 파손하고 그의 민족지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마나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보리진에서는 마나 비슷한 용어가 있다는 증거도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자료는 북미 원주민 자료에 비교될 수 있다 / 북미 원주민 자료는 오세아니아 자료에 비교될 수 있다 / 그러므로 오세아니아 자료는 오스트레일리아 자료에 비교될 수 있다는 문제의 삼단 논법) <기본 형태들>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우선적 자료이고 북미 원주민 자료가 보충적으로 사용된다. 이 원칙은 마나를 도입하면서 깨진다. 여기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마나 비슷한 개념을 유추하기 위해서 북미 원주민의 마나 비슷한 용어들이 먼저 나온다. 북미 자료로 보충하겠다는 원래의 제안이 바로 이 순간의 유추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으로써 오스트레일리아에 제한된 영역을 떠나서 오세아니아 개념 마나를 중심적인 이차적 범주, 성스러움의 해석을 보장하는 것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고 말이다.
2권 6장은 “토템 본체 개념, 혹은 마나와 힘의 관념”이다. 오세아니아와 북미원주민 자료를 바탕으로, 뒤르켐은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이와 비슷한 관념이 있을 것이라고 논의를 이끈다. “마나야말로 우리가 조금 전에 발견한 오스트레일리아 토테미즘의 씨앗이 되는, 편재되어 있으며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힘과 같은 관념 아니겠는가?” 뒤르켐에 있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토템 본체의 사실성을 확립하는 것의 이득은 크다. ‘비인격적 힘’ 관념은 일련의 중요한 목표들을 이루게 한다. 비인격성은 성스러움에 대한 집합적, 사회적 이해를 보장한다. 그것은 또한 종교에 대한 어떠한 신적인 정의도 차단한다. 무엇보다도 물리과학에서 개념화된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힘이라는 ‘객관적인 상관물’을 제공함으로써 사실성을 보장해준다.
 
마나 개념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소극적 의례’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종교적인 힘은 부가superadd되며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성스러움의 이런 측면에 대해 가장 잘 설명된 부분은 토템 문양에 대한 언어학적 유비이다.
 
추룽가는 그 자체로는 나무와 돌 등으로 만든 물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의 특성에 의해서만 같은 재질의 속된 물건들과 구별된다. 그 특성은 토템 문양the totemic mark이 그 위에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문양이, 문양만이 추룽가에 성스러운 특징을 부여한다.
 
“문양mark”은 비재현적非再現的non-representational이며 자연의 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 경험에서보다는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이 논증에서 뒤르켐은 언어학적 유비를 전개한다. 오스레일리아인들은 합리적인 정확성을 갖고 자연 사물들을 묘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바위 그림), 추룽가를 만들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문양들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 문양으로 구성된다. …… 그것들은 관습적인 의미만을 가진다. 기호와 의미화된 사물간의 연결(entre la figure et la chose figurée)은 너무 간접적이고 떨어져 있어, 연결을 지적해주지 않는 한 볼 수가 없다. 오직 씨족의 성원만이 선들의 그렇고 그런 결합에 무슨 의미가 부착되어 있는지를 말할 수 있다. …… 그렇게 획득된 도상의 의미는 너무 자의적이어서 하나의 도안이 다른 토템 사람들에게 다른 두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뒤르켐은 이 언어적 유비를 더 발전시키지 않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이어받아 마나에 대한 언어학적/분류학적 이해를 제안한다.
 
마나 유형의 개념들이 너무 흔하고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의 사고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단지 어떤 문명이나 사유의 가상의 “단계”의 특징이 아니라, 사물을 접할 때 어떤 정신 상태에도 기능하는 사고 형태가 아닌가? 다시 말해 매번 이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고 형태가 아닌가?
 
이 “상황”을 부연하기 위해서, 레비-스트로스는 테바네Thevanet 신부가 알곤킨Algonquin 사람들에 대해서 했던 “매우 심오한 언급”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마니투manitou가 “아직 일반 명사를 갖지 않은 모든 것, 친숙하지 않은 모든 것을 특별히 가리킨다”는 것이다. 민족지 사례 하나를 든 후, 레비-스트로스는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언제 어디서나, 이 (마나)유형의 관념은 확정되지 않은 의미,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어서 어떤 다른 의미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의 가치를 표상하기 위하여, 일종의 수학 기호처럼 끼어든다. 그래서 (마나의) 독특한 기능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러한 환경, 이러한 상황, 혹은 마나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 맞지 않음의 관계가 확립되어서 이전의 상호결합 관계에 손상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기능을 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 있어서 마나 관념은 물리적 “실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마나는 존재론적 범주도 실체적 범주도 아니다. 그것은 언어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미론적 기능”을 갖는다. 그것은 표상, 정확하게 말하면 떠다니는 혹은 정해지지 않은 의미작용(떠다니는 기표)에 의해서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마나 유형의 개념들의 기능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작용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의미작용의 부재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성경의 만나 이야기의 경우, 너무 많은 학문적 에너지가 단어 ‘뒤behind’ 자연 현상을 획득하는 데 소모되었다. 마나에 대한 주장의 경우, 너무 많은 학문적 에너지가 단어 ‘아래beneath’ 초자연적 ‘실재’(마레트로부터 엘리아데까지)나 사회적 ‘실재’(뒤르켐)를 획득하는데 소모되었다. 토착의 어휘집lexicography을 재생산하는데 만족하여 요즘 유행하는 지역주의localism의 분위기에 안주하고, 모든 일반화의 시도에 서구의 덧씌움imposition이라고 낙인찍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토착적 발언의 의미론과 화용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힘의 매개체로서의 마나는 유럽인들의 창안invention”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단순히 ‘창안’을 ‘번역’이라는 용어로 바꾸어보아도, 그 차이는 확연할 것이다. 번역은 불일치를 포함하고 그래서 항상 비판적 평가를 요구한다. 토착 용어에 우선권을 주는 것은 기껏해야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나 사전적 정의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전적 정의는 언제나 학문적 작업에서 거의 쓸모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마나’를 이해하였는지에서 만족하는 것은 적당한 묘사를 낳을지는 몰라도 설명의 힘은 거의 갖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단어를 사용하였는지는 이차적, 전문화된 용법을 낳는 체계적 명문화 과정과 엄밀화 과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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