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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Relating Religion> 12장: 차이를 만드는 차이

by 방가房家 2023. 5. 9.

스미스의 타자에 대한 논문 3부작(11, 12, 13장) 중 하나이다. 이 세 편은 다른 시기에 쓰여졌으나 상호보완관계에 있어서 같이 읽으면 좋다. 내 생각엔 11장이 가장 깔끔한 편이고 종교 사례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글이다. 12장에서는 여러 분야들을 전전하면서 타자는 ‘우리’와의 관계에 의해 설정되는 범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생충학, 아메리카의 발견을 둘러싼 지리적 인식 등이 주요 논의 대상들이다.

 
Jonathan Smith, <<Relating Religion>>, “12. What a Difference a Difference Makes”
 
I. 기생충학의 타자성
학회 주제인 "To See Ourselves as Others See Us"는 번즈1)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스크틀랜드 방언으로 쓰여진 그의 영시는 ‘영어에 가까운 것near-English’이다. 가깝다는 것은 얼마나 가깝다는 것인가? 얼마나 다를 때 차이는 ‘타자성’을 구성하는가? 차이는 동등한 항들간의 비교인 경우가 거의 없다. 차이는 흔히 위계의 서열에 관계되며, 거기엔 상위와 하위를 정치적으로 자리매김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또, 구분은 가까운 이웃 사이에 지어지며, 근접한 타자가 문제가 된다는 것도 볼 수 있다.
“타자가 우리를 보듯이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의 관점에서 노래된 것이다. 기생충학만큼 타자성의 분류와 정의 문제에 전념한 과학 분야는 없다. 기생충은 자연적으로가 아니라 숙주와의 관계성의 양상에 의해 분류된다. 다시 말해 ‘타자성’의 정도에 의해 분류된다. 기생관계parasitism는 숙주로부터 취하는 이득에 초점을 두는 분류로, 공생共生, 상리공생相利共生, 편리공생片利共生 등과 구분된다. 그러한 분류 구분은 분명 정치적이다. 그 정의는 상위와 하위의 위계적 구분에, 이득과 상호성의 구조를 지도그린 것에 기반한다. 기생과 독립 생활 사이에 그어진 선은 없다. 타자성은 분리에 관한 사안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에 대한 묘사이다. 타자에 대한 관계는 시간성의 변환과 관계성의 관계적 양상에 관련된다. 같은 종 내에서도 차이의 정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타자의 이론”은 상호성의 관계적 이론의 형태를 갖게 된다. 고대 그리스어 용법을 찾아보면 기생parasitoi은 성스러움과 관련된 단어이다. “파라지토이는 현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성스러운 무언가에, 성만찬 때 함께 식사하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II.-1. 인류학, 타자에 대한 과학
사회문화적인 타자의 인식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인간/비인간, 우리/그들의 이분법. 족내혼, 족외혼, 근친상간 금기. ‘이방인’(그리고 ‘친구’)에 관련된 예절과 규율. 여행기의 ‘신기한 것들curiosities’. 흔히 차이는 외국인 혐오로부터 이국적 정서까지, 여행, 무역, 탐험으로부터 군사적 정복, 노예, 식민주의까지 이르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태도들에 대한 정당화 요소를 제공한다. 또 타자는 추방의 대상일 뿐 아니라 동경의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름에 대한 문화적 성찰이 시대적 특징일 때도 있다. (기원전 5세기 이오니아, 당과 남송, 정복 이전 목테주마의 아즈텍)
뭐니 뭐니 해도 ‘타자’에 대한 과학은 인류학이다. 인류학에는 타자성에 내재한 인식의 힘, 같음을 연구할 때는 사라지는 그런 힘이 있다. 현대 인류학에서 타자성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관계적인 범주로 남아있다. 첫째, 다름은 인류라는 같은 종 내에서의 차이이다. 현지조사 작업의 결과는 대부분 ‘보통사람everyman’과의 만남에 대한 것으로 읽히게 된다. 둘째, 인류학 보고는 특정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만 기반하기 때문에, 현재 이전의 시대와 역사를 배제하는 이론을 생성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지적 현재’ 내에서 기능주의나 구조주의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두 특성의 결과 인류학 담론에서 타자는 상대화된다. 인류학은 해독解讀의 작업이 된다. 다시 말해 인류학은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언어적 기획으로, 처음부터 의미의 존재와 번역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현대 인류학은 타자성을 소통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는 앵글로 아메리카 철학 전통의 일부로, 타자를 초월과 위협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대륙의 철학 전통과는 반대된다.
 
II-2. 아메리카라는 타자
타자와의 만남이 진정 인식적 충격이 되었던 것은 소위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 여기에서 타자를 언어의 기획으로 보는 인류학적 쟁점이 명백히 시작되었다.
그리스에서 세계, 오이쿠메네는 유럽, 아시아, 리비아/아프리카의 세 땅으로 나누어졌다. 이 그리스-로마적 지리학은 창세기 10장과 결합하여 노아의 세 아들이 세 대륙의 거주자를 형성하였다고 믿게 되었다.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아메리카가 타자성으로서의 인식의 쟁점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정한 ‘타자’로서 인식되어야만 했다.
콜럼버스는 전통적 세계관에 입각해 그가 본 것을 해석하였다. 그는 산 살바도르에 도착하자마자 “지팡구 섬을 찾을 수 있는지 보러” 길을 서둘러야 했다. 그는 원주민들의 말 중의 ‘카리바’를 ‘칸[汗]’으로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나이팅게일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나이팅게일과 다른 카스티야 새들의 노래”를 듣게 된다.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땅과 전통의 세 대륙을 합치시키기가 어려울 때는, 그곳을 기독교 지리의 ‘와일드 카드’인 낙원의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콜럼버스에서 보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실패, 전승된 어휘의 부적합성을 인지하지 못함과, 그에 따라 새로운 어휘의 제시할 수 없음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히 투명했기 때문에, 어느 것도 ‘해독’을 요구하지 않았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피터 마터2)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고찰되었다. 마터는 처음부터 ‘인디아’라는 콜럼버스의 주장을 배제하였다. 그가 제시한 것은 ‘서극西極western antipole’, ‘카나리’와 비슷하다는 것3), ‘앤틸리스’4) 등이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지리학에서 온 용어들이다. 마터가 말한 신세계(novus orbis)는 콜럼버스가 생각한 낙원의 땅도 아니고 베스푸치가 처음에 생각한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연장도 아니었지만, 이들과 다르지 않게 기존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 되지 못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성을 개념화하는 것의 어려움이다. ‘다른’ 무언가가 지각되었지만 분명한 목소리는 얻지 못했다. 낡은 언어를 잡아 늘여stretched 그것에 맞추려고 하였다. 존재하는 세계관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에만, 타자는 이론적 쟁점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혹스Terrence Hawkes는 지적한다. “식민주의자는 근본적으로 극작가처럼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말 안에서 형성된 자기 문화의 ‘형태shape’를 새로운 세계 위에 덧씌운다. 그래서 그 세계를 인식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그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다.”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처음으로 답변을 시도한 이는 오비에도5)이다. 그는 아메리카에 고대 카르타고 인들이 살았다는 가설과 고대에 스페인에 의해 점유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후 창세기 서술에 맞추기 위한 일원발생론monogenetic 가설들이 제시된다. (1)신대륙은 구대륙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주장. (2)제2의 방주가 있었다는 주장. (3)홍수 이후 천사들이 동물들을 옮겼을 것이라는 주장. 아코스타6)는 복잡한 논증을 거쳐 대륙간 다리 가설을 지지했다.
 
 
III
타자성은 서술 범주가 아니라 차이나 공통성의 지각에서 비롯된 인공물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유전이나 친연성의 결정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언어적인 기획이며, 수사修辭와 판단의 사안이다. 그런 이유에서, 타자성은 존재의 절대적 상태가 아니다. ‘그 이외의else’ 어떤 것에 관련될 때만 어떤 것은 타자가 된다. 타자성은 상황적 범주이다.
타자는 ‘우리와 너무 닮았’거나 ‘우리임’을 주장할 때 문제가 되는데, 그것이 ‘타자 이론’의 진짜 긴급함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문제는 다름alterity이 아니라 유사성(때로는 동일성)이다. ‘타자 이론’은 ‘자기 이론’을 언표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기생충이 이론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것이 인간의 공간에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이론적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들이 점차 ‘사이에in between’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북미원주민 문화가 유럽 자신의 과거를 밝혀주는 것으로 보인 바로 그 정도로, 그들은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사유의 대상이 된 사람들 된 것이다.


1) 번스Robert Burns(1759~1796) 영어의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와 시가(詩歌)를 썼다. 정통종교 및 도덕에 대한 반항과 연애로 유명하다.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이 1786년 7월 31일 킬마녹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집은 곧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번스가 1786년 11월 27일에 에든버러로 갔을 때는 명사 취급을 받고 후원을 받았으며 의도는 좋으나 위험하다는 충고를 많이 받았다.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에는 빼어난 스코틀랜드 시와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운문 서한이 실려 있다. 현대 비평가들은 <소작농민의 토요일 밤The Cotter's Saturday Night>과 <산에 핀 데이지에게To a Mountain Daisy>를 뛰어난 시로 꼽는다.
2) 피터 마터Peter Martyr d'Anghiera(1457~1526)는 스페인과 탐험의 시대 동안 스페인의 발견을 서술한 이탈리아 태생의 역사가였다. 그는 중남미 탐험에 대한 일차적 설명들을 일련의 서한들과 보고서를 통해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1511년부터 1530년까지 라틴어로 된 열 장(章)으로 된, 그래서 "decades"라고 불리는 자료를 출판하였다. 그는 <신세계에 관하여De Orbe Novo>에서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첫 접촉에 대해서 묘사하였다.
3) 카나리아 섬의 이름은 라틴 용어 ‘Insula Canaria’, 즉 ‘개들의 섬’에서 왔다. 로마인들은 모리타니의 왕 주바 2세를 통해 카나리아 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BC 40년경 주바 2세가 이 제도를 탐험한 내용을 저술가들인 플루타르코스와 대(大)플리니우스가 기록으로 남겼다. 플리니우스의 저술 중에는 "매우 큰 개(카네)들이 많아 카나리아로 불린다"라는 대목이 있다.
4) 앤틸리스Antilles는 오늘날 서인도제도에서 바하마 제도를 제외한 모든 섬들로 이루어진 제도를 일컫는다. 앤틸리스라는 말은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대서양 건너편 유럽의 서쪽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의 땅을 앤틸리아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중세 지도에는 대륙이나 큰 섬, 때로는 다도해를 표시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이후에는 '안티야스'(Antillas)라는 스페인어가 새로운 땅들을 뜻하는 말로 흔히 통용되었다. 오늘날 많은 유럽 언어에서 '앤틸리스 해'는 카리브 해의 또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5)오비에도Gonzalo Fernandez de Oviedo y Valdes( 1478 ~ 1557 )는 16세기 스페인의 역사학자이자 관료로, 1513년 파나마 지협의 금광 관리자로 임명되어 처음 신대륙에 발을 디뎠으며, 1535~1545년 산토도밍고 식민도시의 총독을 지냈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의 행정관료였을 뿐 아니라 학자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저서인 <서인도제도의 자연사와 역사(La General y natural historia de las Indias)>는 오비에도가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들을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지역의 역사 및 자연환경을 기록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열등하고 게으르며, 악습에 젖어 있는 존재로 묘사하여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6) 아코스타Jose de Acosta(1539~1600)는 예수회 신학자이자 신대륙에 파송된 선교사이다. 신대륙과 유럽의 관계를 최초로 조망한 〈인도 제도의 자연사와 도덕사 Historia natural y moral de las Indias〉라는 책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1570년 예수회에 가입한 뒤 1571년 선교사로 페루에 가서 그곳에 교구 수도원을 세웠고(1576~81), 1587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인도 제도의 자연사와 도덕사〉(1590)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당대의 예수회 정신과 과학사상에 비추어 원주민의 종교와 정치 제도를 포함해 멕시코와 페루의 지리사·자연사를 쓰고자 했다. 아코스타의 책은 그가 16년 동안 남아메리카 서부지역에서 살고 여행한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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