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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Relating Religion> 3장: 엘리아데의 형태론

by 방가房家 2023. 5. 9.

2장에 이어 3장에서 조너선 스미스는 본격적으로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을 꼼꼼하게 독서한다. 이처럼 치밀하게 엘리아데의 책을 디비 판 연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엘리아데 뒷조사 많이 하고 일기장 열심히 뒤진다고 좋은 엘리아데 연구가 나오는는 건 아니다. 이처럼 핵심 저작의 내적 논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도식화해내는 작업이 정말 중요하다. 엘리아데에 대한 이런 작업은 정진홍 선생님의 <종교문화의 인식과 해석>에 실린 엘리아데 연구 이후 오랜만에 본다.

스미스의 엘리아데 독해는 결코 공감적인 독해가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엘리아데의 반대편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스미스 자신의 관점에 입각한 독해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엘리아데의 모든 저서들을 꼼꼼히 읽은 것은 물론이고, 엘리아데 저서에서 사용된 방대한 자료들을 모두, 외국어까지 공부해가면서 검토해보았다고 한다. 자료들에서 어떻게 엘리아데의 이론체계가 형성되었는지의 과정까지 추적한 것이다. 그는 “종교학자들은 엘리아데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오랜 기간 추구해왔고, 이 글은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가 엘리아데로부터 배울 점을 취하는 방식은 잔인하다. 그는 엘리아데를 “형태론적 엘리아데”와 “존재론적 엘리아데”로 나눈다. 그리고 존재론적 엘리아데를 죽여버린다. 이것은 엘리아데가 사용한 이론적 틀거리(그 중 많은 부분은 프랑스 사회학파로부터 왔고, 이 글의 경우에는 괴테의 식물형태론이다)만 취하고 엘리아데의 실존적 고민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껍데기를 취하고 알맹이를 버리는 이 독특한 접근법은, 엘리아데의 진의(眞意)를 따르고자 하는 엘리아데 계승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발상이다. 하지만 나처럼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종교에 접근하고, 엘리아데에 다가서는 데 있어서 그 불투명한 존재론에 항상 가로막혀 결국은 먼 산 보듯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엘리아데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는 것이다. 엘리아데를 분리하는 것에는 고도의 독해가 요청된다. 이 글의 경우에는 다소 무리하게나마 괴테의 형태론을 끌어들여서 그러한 독해를 수행할 수 있었다.

Jonathan Smith, “3. Acknowledgements: Morphology and History in Mircea Eliade's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1949-1999), Part II: The Texture of the Work,” <<Relating Religion>>
1940년 런던에서 엘리아데는 “종교유형론과 종교사의 거대한 종합”을 구상한다. “복합적인 종교 현상에 대한 유형론인 동시에 역사인 통합적인 견해”(<Shamanism>, xiii)는 ‘두 권 전략’을 통해 추구되었다.

(엘리아데는 자신의 접근이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자기 저서가 현상학이라고 불릴 때 엘리아데의 대답은 이랬다. ‘나에게 이 책은 형태론이라고 하는 게 낫다.’) 판 데르 레에우의 <종교현상학>에 대한 리뷰에서, 엘리아데는 형태론적인 기술 용어를 사용해서 현상학의 비역사적 접근을 비판한다. 현상학적 설명은 문화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일어나는 성스러움의 ‘변형modification’과 ‘퇴화degradation’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종교 현상을 종교 현상으로서 보고 의미 있는 진술을 하는 이는 바로 종교사가(the historians of religion)이다. 이 점에서 종교사가는 현상학자와 다르다. 현상학자는 원칙적으로 비교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자는 어떤 종교 현상을 만났을 때 그것에 ‘접근하여’ 의미를 캐내는 것에만 골몰한다. 반면에 종교사가는 이 현상을 비슷하거나 다른 수많은 다른 현상들과 비교하여, 이 현상을 그 현상들 가운데 자리매김한 연후에야 이 현상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 그 수많은 현상들은 시간적으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것들이다.” (<Shamanism>, xv)

위에서 종교사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우리가 <형태론>에 대해 갖는 첫인상일 것이다. 끝없는 비교, 병렬, 예시, 분류들... 그러나 그 묘사들은 ‘수많은 현상들’들을 그려보이는(portray) 것이지 결코 설명하는(explain) 것이 아니다. 엘리아데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종교학의 잠재적 자료의 범위를 끝없이 확장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성현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이것들을 ‘종교적인’ 것으로 분류하도록 정의하는 능력이다.
‘성현’이라는 용어가 반복되는 문장에서 나타나는 엘리아데의 성례전적(sacramental)이고 성육신적(incarnational) 견해, 성찬식 어휘들의 사용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엘리아데가 존재론적으로 발언할 때나(“우리는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성현으로 변화되지 않은 그 어떤 것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인간론적으로 발언할 때나(“주어진 역사적 순간 어느 곳에서나 인간은 여러 사물, 식물, 동작 등을 성현으로 변성시켜(transubstantiated) 왔다.) 여전히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엘리아데의 자료의 확장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개념적 틀만 거부한다면, 정의, 분류, 이론의 문제는 현재 종교학도들에게 남을 것이다.
엘리아데는 “성(聖)은 속과 대립적인 것” 이외에는 도움이 될 만한 언급이 없다고 말한다. “미로처럼 복잡한 요소들로부터 어떠한 공식도, 어떠한 정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는 개념화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데, 이 자신감은 그가 <형태론>에서 괴테의 형태론적 기획을 적용한다는 것에, 생물학 대상에 대한 초점을 종교적 공식화로 재설정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형태론>의 표면 구조
<형태론> 1장에서 엘리아데는 환원론, 본질주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논쟁을 통하여 종교 현상에 대하여 묘사적이고 체계적인 복합성을 추구한다. 이것은 뒤르켐 모스 학파로부터 받아들인, 하지만 실증주의적 경향성은 배제한, “종교적 사실” 개념을 통하여 추구되었다. 엘리아데는 ‘체계’, ‘정합성’, ‘구조’, ‘형태’, ‘양태modality’, ‘요소’, ‘종합ensemble’ 등의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종교적 사실들”이 정합적 체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아데가 의도하는 바는 “독자들에게 종교적 사실의 미궁과도 같은 복합성을 소개하는 것, 그것들의 기본 구조와 그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문화권의 다양성을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괴테의 기획이다: 표면적인 다양성, 심층적인 구조, 문화 환경의 다양성. 성은 괴테 <변태>의 이파리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태론>의 표면 구조는 서문에 명시되는데, 1장 “성현의 유형론” 이후 나머지 장들은 이 구조에 다음과 같이 귀속된다.
1. 우주적 성현(cosmic hierophany): 2-7장. 하늘, 태양, 달, 물, 바위, 대지.
2. 생물적 성현(biological or bio-cosmic hierophany): 8-9장. 식물, 농경.
3. 지역 성현(local hierophany): 10-11장. 성스러운 공간, 성스러운 시간.
4. 신화와 상징(myth, symbol): 위와는 이질적인 체계. 12-13장. 신화의 형태론과 기능, 상징의 구조.

위의 네 종은 ‘아랫방향의 길’로, 즉 우주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학적인 것으로의 운동,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으로의 운동 방향으로 배열된다. 엘리아데의 표현으로는, “성스러움의 구체적인 것으로 점진적인 하강(‘fall’은 하강과 타락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음)”(52), “구체성에 대한 갈증”(99)으로 나타난다. 괴테의 용어로는, 각각의 요소들은 발전과 퇴행의 변태를 겪는 반면에, 전체 계열은 아랫방향의 운동, 퇴행적 변태를 보여준다. ‘구체적인 것으로의 하강’이라는 엘리아데의 형태론 법칙에는 ‘합체의 역설’(26, 'incorporation'은 영역판에는 'incarnation'으로 되어 있다), ‘성스러움의 역설’, ‘성과 속의 역설적 합일’, ‘성현의 변증법’ 등의 언어들을 통해 형이상학적 힘이 부여된다. 그러한 공식들은 환경의 제약, 원래 형태에 대한 특수한 변종이라는 괴테 개념을 존재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것들은 엘리아데의 순수한 형태론 체계로부터는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엘리아데의 순수한 형태론에서, 성현과 구체적인 인간의 상징 투사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것은 “성현이 드러내는 것을 개별적, 국지적, 연속적인 모습으로 더 분명하고 충분하고 더 정합적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자율적인 상징 체계이다. 다시 말해 성현은 ‘드러남manifestation’을 통해 역사적인 것으로 들어오며, 반면에 ‘자율적인’ 상징 체계는 초역사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괴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자율적 상징 체계는 원형적 식물(Urpflanze)과 동일한 지위이다.
완성되지 않은 짝패, 종교사를 형성하고 있다고 가정된 <샤머니즘>,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서는 인간 활동의 다양성을 보여주며 아랫방향과 역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초월성을 향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형태론> 2장 읽기

<형태론>에서 우주론에서 인간론으로의 일반적 이동은 장 배열에서, 장 제목에서, 그리고 각 장의 내적 구조를 통해서 복제된다. 각 장에서 처음에 ‘성의 양태’를 제시하고, ‘인간과 성의 일련의 관계성들’을 보인 후, ‘역사적 순간에 나타난 관계성들’을 보인다. 2장 제목 “하늘: 하늘의 신들, 하늘의 제의와 상징Sky: Uranian Deities, Celestial Rites and Symbols”에서 그 순서를 볼 수 있다. 2장에서 우주적 형태로서의 하늘에 관한 부분과 하늘 신에 대한 논의는 균등하게 배열된다.
(1.1) “하늘은 초월성을 직접 드러낸다.” “‘높음’이라는 초월적 속성은 인간에게 한꺼번에 스스로를 드러낸다.” 인간론적으로, 보편적으로 “단순히 무한한 높음을 인지하는 것”에 기초해서 “초월성의 상징 체계가 도출된다deduced”(‘도출된다’의 맥락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2) 하늘은 인간의 신화적 상상 작용을 통해서 “인격화된다.” 초월적 성격이 주어졌다기 보다는, 하늘 신이 ‘주권’의 형태로 상상되었다는 것. 이것이 ‘무한한 높음의 단순한 인지’가 인간론적으로 개별화된 것이다. (1.3) 지고 신격은 인간의 일에 초연한 존재가 되면서 보다 인간론적으로 ‘교체replaced’된다. 그들은 한가한 신으로 ‘퇴화degrade’한다. (1.4) 하늘의 지고 존재는 인간사에 가까운 신격들과 ‘혼성fusion’된다. 다양한 유형론 과정들, 즉 ‘교체’, ‘혼종amalgamation’ ‘융합assimilation’ ‘덧씌움superimpostion’ 등의 결과 다양한 상징과 신화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 연계들이 내적으로 논리적인 형태론적 변화의 결과이지, 역사적(시간적이거나 인과적이거나)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1) ‘다신론적인 민족들’의 하늘 신들이 다루어지는데, 여기서 역사가 처음으로 작동한다. “‘원시인’의 종교에서 소위 다신교로 넘어갈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중요한 차이는 그들의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분명히 ‘역사’는 원시인들의 신현(神顯)을 변화시켰다(modified). 즉, 원시 민족의 어떤 하늘 신들도 ‘순수’하지 않으며 발생기의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형태forms’는 외부 영향 아래서건, 단지 인간 전통 내에 살아왔기 때문이건 간에, 변화되었다.” 엘리아데의 역사는 괴테의 우발적 변태(accidental metamorphosis) 개념의 자장 내에 있다. 역사적인 것은 내재화되었다. 그런데 역사는 목적론적인 동력으로서, 괴테의 형태의 성취 원리 이상으로 나아간다. 이 민족들의 자의식적인 역사 활동(‘환경’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제국주의)은 내재화된 괴테 유형론의 팽창과 수축, 진보와 퇴행을 교란시킨다. 그 결과는 형태론적 분석을 거부하는 복합적 변종의 혼란이다. (2.2) 형태론적 분석을 유지시켜주는 엘리아데의 두 번째 형태론 원칙은 “원형을 지향하는 경향”이다. 그것은 “종교 형태를 자체로부터 ‘역사적’ 부가물과 침전물을 정화하려는 노력”이다. (3) 하늘 상징과 의례들
(4) 2장을 마무리짓는 멘트를 보면, 한편으로는 형태론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론적인 초구조(엘리아데 사상에는 핵심적이지만 형태론적 접근과는 상관이 없는!)에 관련된 언급이다. 엘리아데는 형태론과 존재론의 체계와 어휘를 분리하지 않으며, 그것이 엘리아데 기획을 평가할 때 중요한 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 현상에 대한 비교적, 형태론적 접근에 관심이 있다면, 그 둘은 갈라져야 한다. (4.1) 형태론적 결론: “우리는 ‘역사’가 천상적 구조의 신격 ‘형태’들을 뒷켠으로 밀어내거나 퇴화(잡종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이 ‘역사’――성스러움에 대한 인류의 계속되는 새로운 실험과 해석――가 하늘의 성(the celestial sacred)이 직접적이고 연속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없애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창조성과 변화, 다시 말해 변태(발전이거나 퇴행이거나)이다. (4.2) 반면에 존재론적인 공식에서 ‘역사’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의미한다. 종교 형태는 역사적인 것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타자이므로. “하늘 상징 체계는, 단지 그 존재 양태가 비시간적이라는 이유로, 모든 종교 체계들 내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형태론적 기획과 존재론적 잡음

순수한 형태론 도식은 표1에서 제시된다. 여기서 성은 괴테의 이파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성현은 유적(generic) 식물에 가깝다. 초월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아랫방향으로 확장되는 계열로, 인간 상상력의 양태로 이해되어야 하는 형태들로 성의 변태를 묘사할 때, 엘리아데는 참 편해 보인다. 이러한 기획에서는 ‘발전’, ‘변형transformation’, ‘변태transfiguration’, ‘변화’, ‘수정’ 등의 괴테적 용어들이 사용된다. 발전적 과정은 ‘교체substitution/replacement’, ‘혼합fusion/amalgamation/assimilation’, ‘덧씌움superimposition’ 등이, 퇴화의 과정에는 ‘타락degradation’, ‘하락devaluation’ ‘추방replacement’, ‘유치화infantilization’ 등이 사용된다. 이것은 엘리아데에 특수한 용어들이 아니다. 심지어 ‘원형’조차도 철저히 형태론적인 함의를 갖는다. ‘역사’는 외부로부터 들어와 발전의 내적 방향성을 변화시키거나 혼란시키는 환경이나 생태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다. 엘리아데가 모든 성현이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즉 어떠한 종교 현상 이해도 “역사의 준거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되풀이하여 말할 때, 그는 이러한 역사 이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원형은 실존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본적인 성현으로 환원되는 단순한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서나 긴 역사적 진화를 보여주는 복잡한 종교 현상들을 만나게 된다.” 괴테가 변태의 우발적 양식이라고 배재했던 것은 엘리아데에서는 역사화의 근본적으로 공간적 구조, 입지(habitat)와 전파(diffusion)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러한 것들은 변개(變改)에 대한 설명이 될 수는 있어도, 형태론자에게는 현상의 주어진 내적 발달 논리를 방해하는 것 이상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세 개의 예가 있다. (1)입지가 변화의 우연적 원인으로 단순히 이해된 것. 엘리아데는 그리스인들은 발달된 물 상징 체계를 갖고 있는 반면에, 대륙에 살고 있는(바다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그러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2)전파를 다루는 태도. 그는 전파론의 논의에서 정합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들 성현들의 풍부한 형태론적 다양성들은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로 환원된다.” (3)세계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샤머니즘’. “비슷한 사유와 의례들이 동방의 영향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다른 모든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다. 동방의 사유는 단지 천계 상승에 대한 의례 공식과 우주론적 생각들 변형시켰을(modified) 뿐이다. 천계 상승은 원형적인(primordial)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전파의 영향을 받은 중앙 아시아 전통은 상동적인(homologous) 것이고, 전파가 닿지 않은 다른 지역은 유사한(analogous)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엘리아데 주장에서 예외적인 것은 없다.
엘리아데에서 예외적인 것은, 그가 끊임없이 역사에 대한 형태론적 이해와 역사를 거부하는 존재론을 결합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다. 이럴 때 엘리아데의 움직임은 심히 문제가 많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위계 내에서 형태론을 완수하려는 짓이다.
형태론적 체계에서 성현은 성이 변태하여 현현한 것(metamorphised manifestation)이다. 존재론적 체계에서 성현은 생성의 영역(the realm of Becoming) 내에서 존재의 역설적인 자기 현시(a paradoxical self-display of Being)이다. 괴테의 형태론에서 환경의 영향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므로, 단지 우연한 역사적인 것이므로 배제된다. 엘리아데 존재론에서 성현은 초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스스로를 부과”하였기 때문에 최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 된다. 괴테 형태론에서 외부성은 쉽게 처분할 수 있음(disposability)의 표식이고, 엘리아데 존재론에서 외부성은 필수불가결함(indispensibility)의 표식이다.

결론

엘리아데는 형태론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는 쟁점을 제기하였다. 그는 형태론적 범주들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하였다. 역사적 변개와 전파의 효과를 분석할 때 형태론 작업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역사적인 것을 부각시켰다. 그는 역사적인 것과 형태론적인 것의 결합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그 결합은 존재론적, 신학적 위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서 이룬 성취였다. 그런 식의 결합의 결과 엘리아데가 비역사적이라는 비판, 흔히 인용되는 엘리아데의 역사에 대한 폭력적인 언어가 나오게 된다. 그런 언어는 <형태론>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형태론>에서 역사적인 것의 표면상의 부재가 형태론적인 기획을 집어치우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통시적인 것과 공시적인 것의 결합: “변화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공시적인 관계들에 대한 선행 분석이 기반이 되지 않고서는 심층적이고 충실하고 풍요롭고 설득력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엘리아데와는 다르면서도 형태론적 의도에 부합하는 작업을 한 이는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역사를 유형화하기 위해 ‘이상형ideal type’이라는 개념을 갖고 작업하였다. 그는 역사적 자료 층위에서의 관계들만이 아니라 유형들 간의, 유형들과 자료들 간의 관계들을 비교하였다.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 개념을 빌려와서 차이에 기반한 유형들 간의 관계를 확실히 하였다. 베버의 이상형의 위상은 엘리아데의 원형보다는 괴테의 원형 관념에 더 가깝다. 베버와 괴테 둘 다 그 개념이 학자의 마음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그것이 이상적인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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