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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Comaroff, "Of Revelation and Revolution" II-7,8,9

by 방가房家 2023. 5. 8.
7.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영약
 
근대 선교에서 의료 활동은 교육과 함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의 명단만 봐도 의료 선교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이 “치료와 전도의 결합”을 가능케 한 것일까? 기본적으로 치료는 육체의 구원을 통해 병든 영혼을 치유한다는 성서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예수의 행적에서 비롯된 성서의 은유들을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저자들은 근대적 맥락에서 그러한 은유들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당대의 영국에서부터 의료의 의미를 탐색한다. 저자들이 묘사하는 19세기 초반 영국의 의료는, 푸코가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묘사하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근대 의학이 탄생하기 이전의 도덕적인 의학이었다. 물리적인 대상으로서 육체가 분리되기 이전의 의학으로, 도덕적인 요구가 위생학적 요구와 결합되어 있었다. 근대 의학의 패러다임이 아난 상태의 의학 선교라는 점에서, 그래서 의료 선교에 ‘영웅적’이라는 수사가 붙는다는 점에서, 19세기 말에 한국에 들어온 의료 선교와는 다른 점을 보인다. 대표적인 의료선교사는 리빙스턴인데, 그가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중국에 필요한 의료인을 모집하는 전단지를 본 것이었다. [여기서 한국 개신교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전단지를 제작한 이는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였다. 그는 1832년 7월 17일부터 한 달간 조선(朝鮮) 서해안을 방문하였고, 특히 고대도에 머무르며 성경 등을 전달하였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선교사들이 도덕적 의학을 바탕으로 츠와나 사회를 기술할 때, 전통 사회는 건강함(well-being)과는 반대의 가치를 지닌 곳으로 묘사된다. 의상, 가옥, 생활 습관들이 “도덕과 건강”에 좋지 않다는 묘사들이 ‘의학적 사실’들로 보고되었다. 기름때 낀 몸, 땀에 절고 냄새나는 그들의 육체는 질병의 근원이 되는 ‘더러움’의 상태로 묘사된다. 5,6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담론들은 메리 더글러스의 이론을 상기시킨다. 더글러스는 동아프리카 현지조사에서 비슷한 더러움 담론들을 많이 접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녀의 이론이 탄생한 맥락이 이해가 된다. 19세기 초중반 선교사들의 의료 행위는 그들의 ‘깨끗함’ 관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모팻의 묘사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그녀에게 약물을 탄 음료를 주고서, 따뜻한 물로 그녀 발을 닦아주었다.” 구경꾼 앞에서 행해진 이 행위야말로 당대 선교사들이 꿈꾸던 영웅적 의료 선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실 그들은 리빙스턴을 제외하고는 전문적인 의료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한 것은 소독과 이물질 제거 등 기초적인 조취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상태’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들의 시술은, 어떤 면에서는 츠와나 전통 의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균형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강조하는 인간학적인 치료 전통(humoral theory)은, 부주의함과 탐욕에서 벗어난 청량함(취디디)이라는 균형의 상태를 좋은 상태(well-being)로 추구하는 전통적인 맥락과 닿아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의료 선교는 한편으로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근대적인 인간상을 전제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의료 인류학에서 강조할 법한 사회적인 치료를 강조하면서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파기하는 모순되는 모습을 보인다.
의료 선교의 의도치 않은 결과는 죽은 자를 부활시킨 예수 행적에 대한 한 츠와나인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예수는 정말 대단한 의사군요. 죽은 이를 살아나게 하다니!”라고 외친 후에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살아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구인들과는 다른 죽음의 의미, 즉 죽음이 삶과의 완전한 결별이 아니라 조상의 형태로 어떤 형태로든 관련을 가졌던 츠와나 인들에게 소생이라는 의료 행위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왔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의료 활동이 이후의 영원한 회복에 대한 징표, 하느님에 대한 전조(前兆)로 읽히기를 의도하였다. 그러나 츠와나 인들에게는 보다 직접적이고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유럽인들의 의료는 세츠와나에 대한 위협이 되기보다는 그것을 보충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신비한 영약”을 얻고자, 의료 행위 뒤에 존재하는 특별한 힘을 ‘획득’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성경에 그 힘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의료에 담긴 힘을 인식한 장면이었다. 갑신정변에서 왕족이자 보수파의 리더격인 민영익이 치명적인 자상을 입어서 거의 죽음에 임박했을 때, 선교사 알렌에게로 옮겨져서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과 왕비는 서양의학과 알렌에게 매우 깊은 신뢰를 갖게 된다.] [두 의학적 관점의 공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 윌리스는 괴질을 예방하기 위해 몇 가지 경고를 내렸다. “하느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를 바라보고 사십시오. 물은 반드시 끓여 먹고, 참외는 절대 먹지 마십시오. 몸을 깨끗이 하고 집 안팎을 말끔히 청소하십시오. 굿판에 참여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주의사항을 적은 쪽지가 곳곳에 배달되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마을 원님이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우리 조선 백성은 우리 식대로 주의사항을 지키면 된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무통을 잘라서 장승을 만들게 했다.]
서구 담론에서 아프리카는 병든 대륙이었다. 그러나 사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서 목격한 것은 건강한 아프리카 인들이었다. 오히려 유럽 문화의 소개가 불러온 비극이 목격되었다. “차갑고 건조한 기후에서 사용되던 유럽식 생활 습관과 의복들을 (여기서) 사용한 총체적인 결과는 질병이었다.” 게다가 설탕, 밀가루, 술 등의 소개로 충치와 소화계통의 질별이 만연하게 되었다. 반면에 아프리카에 부임한 선교사 가족 중에서 풍토병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 사례가 꽤 있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초기의 선교사 부인과 특히 영아 사망자의 묘를 많이 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부인들의 죽음은 그들의 부도덕성과 맞물려서 비난되었다. 건강과 도덕성이 연결되어 있는 사고 방식을 볼 수 있는 다른 예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점은 아프리카를 자료로 해서 당시 유행하던 비교 해부학이나 골상학을 발달시킬 때도 부각된다. 바로 과학적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담론이었다. 아프리카 여성은 그들의 생산력이라는 에로틱한 측면, 성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 대상화되었다. 절제되지 않은 생산력, 방종한 성적 경향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아프리카 여성의 뜨거움은 ‘아프리카 열병’의 근원으로 지목된다. 게다가 생리혈이 부정의 근원으로 인식되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하천에 전염병균이 들끓는 것은 여인들의 피로 오염된 탓이라고 주장하였다. [종교사에서 생리에 대한 오염 관념이 작동한 극적인 예는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고 주장한 한 일본 불교 경전이다. 여성은 생리로 하천과 샘물을 오염시켜서 부처님께 공양할 차의 물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의료 선교를 통한 츠와나 사람들과 기독교의 만남은 현재도 여러 형태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츠와나 전통 의학은 혼성된 치료 기술들을 흡수하여 여전히 현대 의학과 공존하며 존속하고 있다. 흑인과 백인 구역 경계에 위치한 한 전통 의료 시술소에는 적지 않은 보어 백인 단골들이 있다. 한편 교회에서는 카리스마적인 브리콜라주가 형성되어, 치병을 중시하는 시오니즘 계통 교회가 여성들과 하층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또 다른 흔적으로는, 계몽적인 위생 찌라시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위생과 도덕관념이 결부되어 있어서 “도시 지역의 형편 없는 사망률은 죄악과 도덕적 불결함의 결과이다”라고 주장한다. 모팻이나 리빙스턴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정도이다.


8. 새 사람, 옛 백성
 
8장에서는 그 동안의 분석에서 웬일인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법령과 식민주의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그 중에서도 재산권, 토지의 문제인데, 이 주제는 식민주의 연구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기존의 관점에서 제시된 내용들은, 식민화는 우선적으로 정치 경제의 문제라는 것, 식민화의 우선적인 주체는 정치인, 자본가와 회사들이라는 것, 선교사와 같은 다른 부류들은 조연들이거나 기껏해야 이차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식민화 과정을 거대도시의 형성과 종속 계층의 형성이라는 직선적이고 정합적인 강제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 지배층의 관점, 이데올로기, 미학이 피지배층에 부여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 등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많은 수정이 있음을 지적한다. 법의 측면에 있어서, 식민화가 근대화 과정의 일환이 아님은 명백하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다스림에 있어서 그들을 근대화와 시민 사회의 인원이라는 것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물질적 이득을 취하는 과정으로 보았을 뿐이다.
선교사의 맥락에서 보면, 19세기 영국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의 법과 자연법의 구분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신의 섭리에 대해 법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와 세속적 법률주의는 서로 합쳐져 강력한 법률중심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이 세계관이 아프리카에 전달되었다. 소유권, 재산권을 가진 개인이라는 근대의 이상이 ‘이성’ 원칙에 단단히 기반하여 제시되었고, ‘야만인’들은 그에 대한 반대 사례로 기능하였다.
법률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은 법적인 개인 관념이다. 선교사들은 재산 관념의 소개를 통해서 법적 주체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재산 관념만 주어진다면, 자발적인 자영농 계층이 형성되고 지주, 자영농, 노동자로 이루어지는 자체적인 덕스러운 산업 사회가 형성되리라는 마법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맥켄지는 1880년대에 이미 츠와나 사회가 재산권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발전시켰다고 낙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밀이 지적했듯이 자유로운 농부가 재산권을 행사한다는 이상은 영국 사회에서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츠와나 인들에게 개인이 주체가 되어 돈으로 거래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영국식 정의는 종이로 하는 전쟁”으로 비칠 뿐이었다. 츠와나 사회에 개인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름대로 존재하였고, 그 관념의 적용은 선교사들에게 ‘이기적’이거나 ‘교활’하게 여겨졌던 부분이었다. 츠와나 사회에서 개별성은 관계의 확충을 통한 자가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개인은 결혼, 고용 관계, 정치적 연합과 물물 교환 등의 사회적 참여와 이득의 방식으로 실용적이고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다.
선교사들은 또한 결혼의 개혁을 통해 법률과 권리를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결혼을 통해서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의미를 주입하고자 한 것이었다. 과연 결혼의 변화는 기독교의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그 변화 과정은 선교사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1900년 자료를 보면 교회에서 결혼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고 있고, 브라운 선교사는 이를 통해서 결혼의 유대 안에 결혼 서약을 더 엄격하게 지켜지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결혼이 늘어난 것은, 교회 결혼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결혼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도덕과 사회적 참여의 의미보다는 계약의 일이 되었다. 계층 형성과 관련된 변화도 나타난다. 엘리트 계층에서 ‘기독교식 결혼’은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교회가 시민 사회로 여겨진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중산층 사람들은 기독교식 결혼의 보다 간편화된 양식을 택하였으며, 하층 계급 사람들은 극도로 간편화된 비공식적인 결합을 택한다. 그것은 ‘제대로 된’ 개인을 성취하기엔 재산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고안한 방식이었다. [구한말에 유교식 결혼을 할 형편이 안 되었던 하층민들은 친지들과 물만 떠놓고 식을 올린 ‘복수결혼’(福手結婚)을 하였다. 기독교식 결혼(엄밀하게 말하면 신식 결혼)이 한국 사회에 빠르게 보급된 것은 간소한 예식에 대한 욕구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남아프리카의 양상과는 반대되는 면이 있다.]
법률주의가 보급하고자 한 다른 측면은 개인으로 구성된 ‘상상된 공동체’였다. 유럽인에 의해 구성된 ‘베추아나’(the Bechuana)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관습이라는 기본적인 주권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베추아나는 부족을 넘어서는 공통된 어느 집단을 표상하는데, 이것이 ‘민족화된 베추아나’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측면이다. 이러한 모순은 민족주의로서의 베추아나의 발목을 잡는다. 일상의 차원에서 정치학에서는 ‘부족’으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에 베추아나의 자율성은 침해받는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기획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했지만,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에 이식하고자 한 근대에는 두 측면이 모순을 일으킨다. 한편으로는 권리를 지닌 개인주의를 통해서 ‘보편적인 시민’ 사회를 형성하려는 방향성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원시적인 베추아나 정체성을 통해서 ‘인종적 주체’를 형성하려는 방향성이다. [이것은 근대화와 민족이라는 두 담론에 상응하는 것일까? 한국 개신교사 서술에서는 개신교가 근대화의 앞장섰으며, 이는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두 담론의 교묘한 겹치기가 통용되고 있다.]
 
9. 결론
 
마지막 인용문에서 책 제목의 이유가 밝혀진다.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행위,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이상, 새로운 방향, 새로운 물리적 정신적 영적 가능성과 능력들이 아프리카인들에게 계시(reveal)되었다. 이 완벽한 혁명(revolution)은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발전의 주요 동인인, 조용하고 차분하게 일해 온 선교사들 덕분이다.” 유럽 사회의 이상이 ‘계시’되었다. 이것은 종교적 동기와 유럽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분리하기 힘든 결합을 암시한다. 또한 ‘게시’가 ‘혁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도, 저자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와 종교의 한몸됨을 절묘하게 표현해준다.
저자들은 식민화가 경제적인 ‘동시에’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동시에’ 상징적이고, 일반적인 ‘동시에’ 특수한 것임으로 보이고자 했다. [동시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술적 비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육체와 정신의 관계와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어떤 관계가 되었든 기울어짐 없는 이 불안한 관계는 지속가능한가?] 또한 유럽의 보편화 에토스가 물질적인 동시 도덕적인, 세속적인 동시에 영적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베버 노선을 따라서 산업 자본주의와 기독교 정치 경제가 긴밀하게 묶여 있음을, 개신교와 자본주의 간의 선택적 친화성을 보이고자 하였다고 했는데, 이 야심찬 의도는 꽤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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