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명/경작, 식민화, 기독교
선교사 모팻은 말한다. “문명화(civilization)는 땅의 경작(culture)에 기인하며 의존한다.” 선교사들은 미개 상태에 있는 츠와나 사람들의 삶의 습관을 개혁하는 방법은 농경을 가르쳐서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선교사들은 영국 요먼의 잃어버린 이상, 농촌의 신화를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로버트 모팻의 아버지는 전문 정원사이자 농부였다. 그에게 선교는 아프리카 형제들의 “손에 쟁기를 들려주어” “죽는 영혼들에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게 하는 행위였다. 경작을 가르치는 문명선교에는 성서적인 전원성, 낭만적인 자연주의, 그리고 노예제반대론자들의 도덕론이 함께 들어 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적용한 것은 없음의 담론이었다. 화폐, 시장, 경작 작물, 관개 기술, 농경 능력 등의 부재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능력의 부재. 비이성적임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진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선교사의 농경 생산에서 심지어는 미학에 대한 집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농경지를 “잘 정돈된, 기하하적인, 담으로 구획된 풍경”을 만든 것에 만족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들의 기획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츠와나 인들의 “야만적인 미신”이었다. 아프리카 인들이 농사의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로 믿고 있었던 것은, 얼마나 터부(특정한 나무를 베지 않는 것, 젊은 소의 거세에 대한 것 등)를 지켰는가, 여성의 부정이 구름이나 작물 재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 주술의의 조작에 의해 밭의 생산력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등이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자기들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전통에 대한 보수성이 강했다. 그리고 츠와나 전통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생산에 있어서의 성적인 관계였다. 밭의 경작에 관여한 것은 여성이었고 남성은 다른 생산 영역에 관여하는 이 사회 구조는, 선교사들이 보기에는 ‘위아래가 뒤집힌’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들 “삶의 게으름”은 선교사들의 빈번한 비난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선교사들이 이들의 농업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도입한 농경 기술은 츠와나 농경을 탈주술화하고 물질적 개인주의의 원리에 입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혁신들은, 첫째 기술혁신은 쟁기를 사용하는 것, 즉 땅을 깊게 가는 것이었다. 둘째는 유럽식으로 구획을 지어서 땅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게으름을 타파하고 노동 개념을 주입하는 것이었고, 넷째는 새로운 노동 분업의 조직화로, 남성은 공적인 일에, 여성은 가사 노동에 귀속시키는 남녀 노동 구분을 츠와나 사회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츠와나 인들은 백인들에게 어떠한 내적인 능력이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신비스러운 농사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에 인접한 땅을 차지함으로써 그 주술적 힘을 나누어받으려 하였다. 다른 반응으로는, 반항적으로 관개 시설을 방해하거나, 댐을 망가뜨리거나 밭의 과일을 훔치는 등의 행위가 있었다. 선교사들에게는 농업이 세속적인 문제였는지 몰라도, 츠와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동시에 영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그들이 선교사들의 기술을 받아들일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농사는 여자들의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여성에게는 소에 대한 금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간극의 해결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농업의 변화는 츠와나 사회에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헤게모니의 변화이다. 남녀의 노동 분업, 남녀 각각에 할당된 영역, 여성의 부정 등 헤게모니로서 유지되어 온 내용이 소를 통한 밭갈이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농업의 변화를 통해서 “진정한 농민 계층”, 영국식 자영농의 육성을 꿈꾸었지만 남아프리카의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쟁기와 소라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인 부유한 계층이 있었던 반면에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두 가지 형태의 농업, 새로운 농업과 구식 농업이 공존하게 되었고, 둘 간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1865년에도 “여성들이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짓는 구식” 농업이 여전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쉽사리 가사 영역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업을 통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며, 밭을 갈 때만 남성을 불러 소를 사용하는 식으로 농사일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상품 경제의 영향이 미치면서 빈부의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었으며, 킴벌리에서 광산이 형성된 이후에도 상황은 악화되었다. 빈곤과 예속으로 인하여 남아프리카에서는 농민 프롤레타리아(peasantariat)들이 생겨난다. 그것은 토착민들을 노동력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던 식민지 정부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변화이기도 하였다.
츠와나 사회 농업의 변화는 번디(Colin Bundy)가 제시한 남부 아프리카 농업의 흥망에 대한 설명과 부하하는 면이 있다. 대부분의 남부 츠와나 인들에게, 남아프리카 식민 정치 경제로의 편입은 독립적인 생산자로서의 삶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몰락은 빈곤으로의 몰락일 뿐 아니라,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힘에 예속된 상태로의 몰락이기도 하다. 반면에 이 변화의 다른 측면은 농업 사회의 계층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러시아 농민 사회에 대한 레닌의 설명을 원용하여 츠와나 사회에 세 계층이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은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외부적 영향과 세츠와나를 지키려는 노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①부유한 계층은 선교사들의 농업 기술이 수용해서 생산력을 확대하였다. 그런데 그 수용은 서구적 생산의 “마술적” 효과를 받아들인, 전통적 세츠와나에 입각한 주술적 합리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늘어난 수입으로 소를 사들였고, 상품적 작물 재배를 통하여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그 번영은 신비한 방식에 의한 것이지, 결코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②하층 농민들은 선교사들이 소개한 농기구를 사용할만한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구식 농사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독립 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실용적인 의례를 강조하는 카리스마적인 소종파 운동의 성원이 되기도 하였다. 여성들의 농사일은 유지되었다. 다만 농사에 소가 필요한 경우에는 남성을 불러들여 일을 시키는 방식으로, 전통을 지키면서도 상황을 해결하였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이들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환에 머물러 있고, 미신에 경도되어 있는, 세련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사람들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발달된 생산 방식을 받아들였고, 가능한대로 유럽의 상품을 구매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발달시켰다.
③상층 농민들은 쁘띠 부르주아이고, 하층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면, 그 가운데는 중간 계층의 농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크고아와 세츠와나 둘 다를 부여잡은 사람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농기술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참여하면서도, 물질적인 조건에서는 충분히 물을 공급받은 토지를 가지지 못했고 전통적인 계약 관계에 묶여 있었다. 요컨대, 그들은 상층 농민들의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관행들을 공유하면서도, 상호성에 의존한다든지 자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선호한다는 면에서는 하층 농민과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규모가 크고 전례적으로 정통에 더 가까운 독립교회들의 신자가 되었다.
4. 개종의 통화(通貨)
선교사들에게 아프리카인의 구원은 경제 관념의 교육과 관련이 있었다. 하느님의 재능을 이용하여 가능한 가장 큰 이득을 창출하는 것이 가르쳐야 할 바였다. 19세기 영국 개신교도들의 경제에 대한 태도를 쉽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대의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본 관념들이 공유되어 있음은 볼 수 있다. 당시 경제관과 기독교가 결합한 “세속적 신학”의 극단적인 형태로는 젠크스(Jenks)의 언급을 들 수 있다: “자본의 투자는, 사업을 하고 농장을 구매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의 근본적인 행위이다.” 저자들은 경제적 개혁이 단지 복음 전도의 보조적인 활동, 종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속적 수단 이상의 것으로, 경제는 세계의 가치와 덕목을 생산하는 성스러운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장의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선교사들의 경제에 대한 태도가 그들의 복음과 얼마나 정합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복음 전도에 경제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경제에 끼친 영향의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보인다. 그들의 경제적 영향은 신학적 의도성과는 별개였으며, 오히려 그들의 “상식”과 생활인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웨슬리는 “불의한 재물의 친구가 되라”고, 성서의 내용을 뒤집어 설교한다. 당시 개신교인들은 부정한 재산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그것을 덕목으로서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다. 돈은 귀중한 재주(talent)였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청지기 개념이 암시하는 바, 그들에게 시장 경제는 ‘도덕적인’ 경제라는 낙관적인 확신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츠와나 경제에서 가치 체계는 서구와는 상이한 것이었다. 여기서의 노동 관념은 양화되어 돈과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관계망 형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가치있는 재산으로서 여겨진 것은 소였다. 소는 교환을 통해서 서양에서의 돈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소는 “젖은 코를 가진 하느님”이었는데, 여기서 소가 물신(物神)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소는 돈과 같이 사람들의 관계에서 비인간화시키거나 생산관계를 객체화하는 기능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확충을 의미한다. “소를 가진 바보는 바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소의 사용은 남들과 자신들을 연결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확장함에 있어 ‘소외시키는 객체’(alienable object)를 사용한다는,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의 한 예가 될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저자들의 물신 개념 적용은 맑스의 개념의 알맹이인 소외 개념은 배제가 되었고, 그저 “젖은 코를 가진 하느님”이라는 표현에 기댄 적용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여기서의 소의 역할에 대한 분석은 모스의 <<증여론>>에서 제시된, 선물을 매개로 한 개념의 유통과 연장선상의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츠와나 경제에서 또 하나 화폐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은 구슬이었다. 이것은 서구인들과의 교역과 관련된다. 서양 상인들은 상아나 가죽을 사가면서 구슬을 주었는데, 이것이 중요한 매개 수단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세켈레 추장은 말한다. “너희 백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당신의 물건들은) 우리 여자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 백성들에게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들에 대해서 혐오하도록 가르친다.” 선교와 더불어 유럽의 상업은 남아프리카 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 선교사들은 상인들과 동행하는 경우도 많았고, 선교지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경우도 많았다. 상업을 문명화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했던 선교사들의 낙관적 전망은, 곧 냉엄한 현실과 부딪히게 된다. 법률적으로 식민지 경계 밖인 내륙에서의 상업 활동은 금지되었으나 선교사들은 이 규정에서 면제되었으며, 실제로 상업 활동에 관여하기도 한다. 실제적인 상업 활동은 선교사와 함께 들어온 상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상점을 개설하고 진열창을 통해 상품들을 보여주어 원주민들에게 구매욕을 심어주려고 하였다.
“불의한 재물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나이브함에 대해서 명백한 교훈을 얻게 되는데, 브랜디의 수입이 가장 좋은 예이다. 몬취와 추장은 말한다. “케이프 정부는 우리 백성들을 브랜디로 죽이지 말아 달라.” 영국을 방문했던 추장들은 다른 ‘힘의 근원’들은 보았지만, 브랜디의 생산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런 악의 근원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워서가 아닐까?” 광산이 설치된 이후에는 상업화의 사악한 측면이 더 드러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츠와나 경제에서 유통의 수단이 된 것은 소, 화폐, 구슬이었다. 이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 혼성이었다. 각각은 나름의 존재 논리를 갖고서 다른 영역에소 공존하였다. 때로는 새로운 매개물이 들어와 기존 매체와 충돌을 빚기도 한다. 1820년에 선교사가 처음으로 노동 대가로 지폐를 지불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물건에 대한 종이돈을 받았을 때, 그것은 그 사용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그 돈은 그들이 원하는 물건에 비해 너무 하찮다고 해서 거부되었다. 그들은 더러운 종이 조각을 멸시하면서, 이 종이를 준 사람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의 교육에는 돈에 대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물건의 교환에 페니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돈의 사용을 가르쳐주었다. 산수 역시 교육되었다. 이러한 수량화(數量化)가 식민주의의 한 과정이라는 것은 다른 저서들에서 많이 지적된 바가 있다. 이와 함께 선교사들이 가르치고자 하였던 것은 노동 관념이었다. 선교사들은 츠와나 사람들의 게으름을 꾸짖었고, 자신들의 모범을 통해서 부지런한 노동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나중에 이렇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남쪽으로 갔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얻어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강조한 개화(開化)의 내용에서도, 노동 관념이 강조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하고, 전통적으로 일하는 것을 천하게 여긴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선교사들은 기독교적인 노동관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선교사의 입장에서 소는 자신의 경제 가치를 주입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소는 우리의 바클레이 은행이다”라고 말하는 츠와나 인들은, 소의 구입을 통해 부의 축적을 해나갔다. 그런 그들에게 1890년대의 우역(牛疫)의 대유행은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를 하느님의 개입으로 생각하였다. “재산을 상실한 것이 사람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가르쳐줄 수만 있다면, 이것은 위장된 축복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그것이 부족과 반공산주의적인 부족 생활을 파괴한다면” 우역이야말로 하느님이 보낸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극단적 발언들은 선교사들이 경제적 가치의 전달에 개한 강박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재난에도 불구하고 소의 가치는 격하되지 않았고 오히려 소에 대한 신비한 가치가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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