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번역된 책에서 탈랄 아사드는 이슬람 관련 자살테러를 논하는 종교학자, 구체적으로 자살테러에 ‘희생’을 적용하는 이반 스트렌스키의 설명에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이슬람 전통에서 짐승의 도축을 수반하는 희생제의(다비하)를 행하는 경우는, 신의 명령에 응할 때, 신에게 감사를 표할 때, 특정한 잘못을 뉘우칠 때, 이렇게 세 가지 경우다. 이 중에 자살테러자에 해당되는 것은 없다.
희생제의를 통해 뭔가가 ‘성스러워진다’라는 스트렌스키의 생각은 보기보다 막연하다.……희생제의를 통해 ‘성스러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희생제물을 받는 신, 희생제물을 바치는 인간, 희생제물, 셋 다 성스러워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희생제의가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탈랄 아사드, <<자살폭탄테러>>(창비, 2016), 김정아 옮김, 77.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는 “자살테러를 희생으로 보는 것은 기독교와 포스트기독교 전통에서 파생된 의미를 자살테러에 쑤셔 넣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전반적인 논지”(90)라고 자신의 입장을 요약한다.
희생이라는 용어 사용의 엄밀성 결여를 지적한 것이 인상적이다. 나도 최근의 학술 발표에서 희생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을 느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기독교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윤리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는 일이 잦다. 물론 내 수준은 막연한 느낌 정도였다. 아사드는 ‘희생’이 전제하는 기독교적 모델을 지적한다. 그것이 다른 전통에 적용될 때 일으키는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이슬람의 사례에서 배운 것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희생 개념은 유교의 전통적 용례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성경에서, 그리고 이론가라고 해봤자 르네 지라르 정도에서 배운 것이다. 이 용어를 마구 적용할 때 생기는 한계를 정리해 볼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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