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의 선교 회고록에서 인상 깊은 몇 구절을 발췌. 원서를 확인할 수 없어 대부분 번역서를 따름. 2016년 출판된 책이지만 사실상 1976년 번역이어서 옛 어투가 정겹다. ‘토인’(土人)이 ‘native’의 번역인 것은 이번에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다. ‘자연아’(自然兒)는 무엇을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2016).
1. 주술의(呪術醫)로 불린 슈바이처
토인들 사이에서 나의 이름은 ‘오강가’라 불린다. 갈로아 말로 ‘주술사’라는 뜻이다. 흑인의 의술자는 모두 동시에 주술사가 되므로, 의사에 해당하는 다른 말이 없는 것이다. 나의 환자들은 병을 고치는 자는 또한 병을 멀리서 일으키는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의사가 좋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은, 내게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55-56)
2. 일부일처제를 강요하는 것의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취했던 태도와는 다른 접근을 보여 준다.
우리들은 이곳에 일부일처제의 이상을 가지고 왔다.……그러나 이곳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일부다처제가 당면한 경제적 사회적 상태와 극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미개인에게서 일부다처제를 개혁하라고 한다는 것은 바로 그들 세계의 사회구조 전체를 동요시키는 것이 된다. 경우에 합당한 새 사회질서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해서 좋겠는가? 그렇게 하더라도 일부다처제는 사실상 존속하고, 첩들만이 정당한 것에서 부당한 것으로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179-80)
3. 시간관의 차이(표현이 좀 거칠게 되어 있다)로 인해 기독교 교리 이해의 중점이 달라진다는 지적. 성육신 교리나 종말론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신에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들에겐 종교의 기본적인 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천성적인 큰 능력이 마련되어 있다. 기독교의 역사적 의미는 물론 토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전적으로 일종의 역사가 없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와 우리들 사이의 세월을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떻게 하여 구제가 신의 섭리에 따라 준비되고 실현되게 되어 있나를 이야기하는 교의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원시인의 종교에서는 피안에 대한 희망이나 공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자연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전면에 나와 있는 중세 기독교의 형식은, 윤리적인 형식보다 그들에게 접촉점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예수에 의해 계시된 도덕적 인생관, 세계관이며, 신의 나라와 신의 은총의 교의다.(220-21)
4. 슈바이처의 윤리적 입장은 선교 당시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내상을 입었다. 그는 윤리적 권위의 상실을 뼈아프게 고백한다. 한국 선교에서 세계대전이 선교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증언을 본 기억이 없다.
많은 토인들이 자기에게 사랑의 복음을 선교한 백인이 어째서 서로를 죽이며 주 예수의 계율을 지키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음을 우리 모두 느낀다.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이 전쟁으로 인해 자연아 사이에서 백인의 윤리적 종교적 권위가 얼마나 손상되었는가 하는 것은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생각하니 두렵다.(1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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