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평전은 삶과 저술이 촘촘히 얽힌 거장의 세계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이 황홀한 초대의 내용을 쉽게 요약되지 않는다. 다만 종교에 관련된 내용 하나만을 메모해둔다. 이 책에는 프로이트 말년의 문제작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의 저술 과정과 맥락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전에 그 책을 읽었을 때는 괴이한 책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 그 책이 프로이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는 그 책이 “프로이트의 작업 전체를 보자면 약간 괴짜”이며 “역사소설”에 가까운 점이 많다고 냉정하게 평가한다.(527) 그럼에도 모세라는 주제(“유대인은 모세라는 인간의 창조물이다”)는 프로이트가 말년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주제이며, 그런 주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많은 것들, 또 옹호 불가능한 많은 것들”을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마음으로 밀고나가는 것, 그것을 “프로이트다운 것”이었다고 저자는 해설한다. 프로이트의 이 책은 역사적 논거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힘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아야겠다.이 책이 유대교, 나아가 기독교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렸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프로이트의 주장 전체가 활자화되자 유대인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도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를 불쾌하게, 심지어는 괘씸하게 여기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두 번째 에세이에서 가정한 고대 히브리인의 모세 살해를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범죄, 그가 <<토템과 터부>>에서 분석했던 범죄의 재연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선사시대 트라우마의 새로운 변형이며, 억압된 것의 귀환이었다. 따라서 흠 없는 예수가 죄 많은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기독교의 이야기는 “명백하게 편향적으로 왜곡된 형태로” 그런 범죄를 또 하나 감추고 있음에 틀립없다. 아니나 다를까, 프로이트는 궁지에 몰린 범죄자와 마주선 가차 없는 형사 같은 말투로 “어떻게 살인의 죄가 없는 사람이 스스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살인자들의 죄를 떠맡을 수 있겠는가?”하고 묻는다. “역사적 현실에서는 그런 모순이 존재하지 않았다. ‘구세주’는 한 사람의 중요한 범인, 아버지를 힘으로 누른 형제단의 지도자 외에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피터 게이, 정영목 옮김, <<프로이트>>(교양인, 2011), 2: 519-20.
이어지는 서술에서는 이에 대한 당대 종교인들(유대인과 기독교인 양쪽 모두)의 반발을 다루고 있다. 사실 프로이트는 종교에 대한 적의를 갖고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작업을 밀고 나갔고, 눈치 보지 않고 세상에 내놓았을 뿐이다. 그것이 종교인에게는 불순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종교에 대한 과학적 논변을 밀고나가는 이 대목에서 종교학자로서의 그의 입장이 충분히 느껴진다. 그는 종교를 미워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종교학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