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개수를 기준으로 종교를 분류하는 기술은 선교사 문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일신론과 다신론의 구분을 필두로 해서 거기서 파생되는 복잡한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막스 뮐러의 저작 중에서 그 어휘들을 완벽하게 정리해서 제공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우 중요하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매우 유용한 분류가 다신론적(polotheistic), 이원론적(dualistic), 유일신론적(monotheistic) 종교로 나누는 것이다. 종교가 상위의 힘(Higher Power)에 대한 믿음에 주로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 상위의 힘의 성격은 세계의 종교들을 분류하는 가장 독자적인 특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 게다가 두 다른 종류들을 추가하는 것이 확실히 필요하다. 그들은 단일신론적(henotheistic) 종교와 무신론적(atheistic) 종교이다. 단일신론 종교는 여러 신격들이나 신명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들이 나머지와는 독립적인 각각의 신을 나타내며, 또 예배드리거나 기도드리는 신자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신론 종교와는 다르다. …… 무신론적 종교에 관해 말하면,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보일지도 모르겠다. …… 기독교 성립 이전에 가르쳐진 최상의 도덕은, 신들이 단순한 허깨비가 되어버린 사람에 의해서, 알지 못하는 신(the Unknown God)에 바치는 제단도 없는 상태에서 교육되었던 것이다. Muller, Friedrich Max,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882[1870]), 80-82. (이 책의 전체 본문은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우리말 번역은 김구산 옮김, <<宗敎學 入門>> (동문선, 1995)을 참고할 것.)
위의 내용은 다소 의외였는데, 내가 공부가 부족한 탓에 일신론이니 다신론이니 하는 말은 신학적 논의에서 형성된 용어로 생각했던 탓이다. 뮐러의 ‘비교종교학’은 선교사들이 낯선 종교를 분류하는 용어를 제공해주었고, 다시 선교사들은 그 용어를 통해 작성된 자료를 종교학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던 그 끈끈한 관계를 새삼스레 다시 느끼게 된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유일신론을 정점에 두고, 나머지를 그에 비해 하위의 단계 혹은 타락한 상태로 상정한다. 뮐러가, 그리고 뮐러가 참조한 선교사들이 중국 종교를 이해한 방식을 보면 그 쓰임새를 이해할 수 있다. 뭘러의 동료였던 레게가 이해한 중국종교사의 일단(<효경> 16장에 대한 레게의 주석)을 간단히 표현하면 ‘유일신론->이원론->다신론’이라는 퇴화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선교사와 뮐러는 상제(上帝)로 대표되는 원시유교 개념에서 유일신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 유일신론적 원리는 후대에 ‘천(天)’과 ‘지(地)’를 대등한 것으로 놓는 이원론적 이해로 후퇴하였고, 이것은 그 이후의 다양한 신을 모시는 다신론으로의 타락의 전조가 되었다. 이원론을 유일신론의 후퇴로 놓고, 중국 사상의 본질을 유일신론으로 놓으려는 이러한 이해가 얼마나 자의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논리적 전개에서 유일신론, 이원론, 다신론 등의 용어가 선교사 구미에 맞는 종교사 정리를 하는데 얼마나 위력적인 도구가 되었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뮐러는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127-129에서 유일신론 중심의 중국 종교사 이해를 이야기한다. 이는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과의 상호관계에 의해 형성된 이해인데, 그가 ‘God’의 상제로의 번역을 주장한 메드허스트를 주로 인용하는 것이 눈에 띈다. (메드허스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한문 성서 번역 때 신 명칭 논쟁에 관한 자료)
아울러 뮐러가 유명하게 만든 개념, 단일신론(henotheism)에 대한 설명도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더우드가 이 개념을 오용하여 한국종교사를 설명한 적이 있다. (언더우드의 이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이 글의 1-3을 참고할 것. 일본인 학자 아카마츠가 그러한 개념 사용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이 글의 아카마츠 요약 부분을 참고할 것.)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유일신론을 정점에 두고, 나머지를 그에 비해 하위의 단계 혹은 타락한 상태로 상정한다. 뮐러가, 그리고 뮐러가 참조한 선교사들이 중국 종교를 이해한 방식을 보면 그 쓰임새를 이해할 수 있다. 뭘러의 동료였던 레게가 이해한 중국종교사의 일단(<효경> 16장에 대한 레게의 주석)을 간단히 표현하면 ‘유일신론->이원론->다신론’이라는 퇴화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선교사와 뮐러는 상제(上帝)로 대표되는 원시유교 개념에서 유일신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 유일신론적 원리는 후대에 ‘천(天)’과 ‘지(地)’를 대등한 것으로 놓는 이원론적 이해로 후퇴하였고, 이것은 그 이후의 다양한 신을 모시는 다신론으로의 타락의 전조가 되었다. 이원론을 유일신론의 후퇴로 놓고, 중국 사상의 본질을 유일신론으로 놓으려는 이러한 이해가 얼마나 자의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논리적 전개에서 유일신론, 이원론, 다신론 등의 용어가 선교사 구미에 맞는 종교사 정리를 하는데 얼마나 위력적인 도구가 되었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뮐러는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127-129에서 유일신론 중심의 중국 종교사 이해를 이야기한다. 이는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과의 상호관계에 의해 형성된 이해인데, 그가 ‘God’의 상제로의 번역을 주장한 메드허스트를 주로 인용하는 것이 눈에 띈다. (메드허스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한문 성서 번역 때 신 명칭 논쟁에 관한 자료)
아울러 뮐러가 유명하게 만든 개념, 단일신론(henotheism)에 대한 설명도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더우드가 이 개념을 오용하여 한국종교사를 설명한 적이 있다. (언더우드의 이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이 글의 1-3을 참고할 것. 일본인 학자 아카마츠가 그러한 개념 사용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이 글의 아카마츠 요약 부분을 참고할 것.)
뮐러가 종교학을 통해 꿈꾸는 것이 선교사들이 다른 종교 연구를 통해 꿈꾼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얼마나 가까운 것이었는지는, 마지막 4강에서 등장하는 다음 언급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진리가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종교를 연구하는 아름다운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진리가 하느님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그 태도에 미심쩍은 시선을 거둘 수 없다.
하느님이 존재하고 천지를 창조했으며 지속되는 섭리를 통해 세계를 다스린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무지의 시대에 철저히 버림받아서, 그들의 종교 전체가 허위이고 예배 전체가 코메디이고 삶 전체가 웃음거리였다고 말이다. 세계 종교들에 대해 정직하고 독자적인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이 말들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 그 연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쳐주었던 것, 즉 몇 줌의 진리도 담고 있지 않은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가르쳐 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디보다도 고대 종교사에 ‘신이 인류에 가르쳐준 것’이 뚜렷이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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